덩굴 라일락 향기를 찾아서-#4. 화진포
“인간의 말과는 달리 음악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지만, 우리네 마음의 움직임을 모방하기 때문이다.”_M. 프루스트/‘바다(<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중에서)
1.
먼저 ‘진’도 자기만의 여행법 같은 것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는 가끔씩 세상이나 사람이 지겨울 때 홀로 여행지로 갔다 오는 곳이 있어요.
‘강원도 고성 화진포’(#귓속말로)
그날이 그랬어요. 공식적으로 ‘개인 일정’으로 회사에 휴가를 내고, 집에는 늘 그렇듯이 아무일 없은 것처럼 회사로 출근하는 것으로 하고… . 물론 그 순간까지 마음속에는 거짓말에 대한 죄책감과 여행지에서 보내는 해방감이 순간순간 싸우게 마련이지만, 결국 이기는 것은 처음에 떠오른 생각… . 아, 화진포!
제가 겉으로 차분하고 규칙을 따르는 것 같지만, 가끔씩은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을 할 때가 있어요. 변명이지만, 그런 자기만의 숨 쉴 틈 하나 없이 꽉 짜인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요?
2.
지금은 동해바다로 가는 길이 많이 생겨서 선택할 수 있는 루트가 많지만, 저는 늘 홍천 화양강 휴게소를 거쳐 인제, 미시령으로 속초에 간 다음 바다를 끼고 북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려서 화진포에 이르는 길로 가요.
그런데 왜 굳이 화양강 휴게소를 ‘찍고’ 가는지 궁금할지도 모르겠네요.
화양강 휴게소는, 마치 양평 두물머리처럼 화양강이 홍천강과 합류하는 바로 그 지점을 바라보는 높은 절벽에 있어요. 국도변 휴게소라 소박하고 아담하지만, 건물 뒤편 전망용 데크에서 바라보면 멀리서 잔잔하게 흐르며 다가와서 곡선을 그리며 휘어져 나가는 여울이 퍽 인상적이죠. 멋진 휴게소가 많지만, 개인적으로 ‘뷰’만 따지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멋진 휴게소… .
처음 이 정다운 휴게소를 알게 된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군대 시절 (지금은 사라진) 서울 상봉버스터미널에서 속초/고성(간성)로 가는 버스들이이 쉬어가던 휴게소라서 강원도 고성에 있던 부대로 휴가 복귀하면서 몇 차례 들렀던 듯해요.
3.
개인적으로 혼자 떠나는 여행에 음악이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쉽게도, 저 역시 노래를 좋아하고 가끔 부르기도 하지만, 섬세한 음악의 언어를 정교하게 이해할 만큼 재능이 있거나 제대로 음악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에요.
하지만 음악이 주는 저 황홀감은 조금 경험한 적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그런 순간은 순수한 음악 자체에 의한 거라기보다는, 대부분은 음악을 들으며 우연히 어떤 풍경이나 장면을 바라볼 때 마치 축복처럼 오는 것 같아요.
그런 ‘음악의 순간’을 제 빈약한 언어로 설명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거지만, 겸허하게 미리 실패를 인정하고 최근의 음악적 경험을 가능하면 있는 그대로 공유해 볼게요.
4.
그날은 마침 화양강 휴게소에서 출발하면서 최근에 즐겨 듣던 말러의 교향곡 1번(거인)*을 들으면서 가는데, 이윽고 미시령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고도가 조금씩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죠.
마침 ‘거인’ 도 무거운 3악장을 지나 격렬하면서도 서정적인 마지막 악장에 다가서고 있었죠. 결국 가파른 고개를 넘어 아름다운 고원에 이른 듯한 그 선율 부근에서 갑자기 가슴이 뭉클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군요… .
어디선가 거대한 손길이 부드럽게 내 어깨를 감싸며 ’괜찮다, 괜찮다… .‘ 하듯이… .
그 순간, 어쩌면 그날은 화진포에 가기도 전에 여행의 절정은 이미 지나가고 있었는지도 올라요.
5.
무엇보다 그날 내가 만난 건 말러도, 음악도 아닐지도 몰라요. 어쩌면 말러의 음악을 통해서 엿본 나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었는지도 몰라요.
살아서는 결코 건너지 못할 심연 앞에 두고 멀리 흰 안개에 싸인 푸르른 ‘진’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초라한 한 남자의 뒷모습… .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