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퇴원 이 주째. (보존적 치료로 집에서 누워만 있기로 약속하고 병원에서 퇴원을 했다.)
의사 만나러 병원에 가는 게 설렐 정도로 외출할 일이 없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나마 병원에라도 가면 진료도 받고, 그 핑계에 남편이랑 외식도 하고, 카페에도 들러 오고 나면 그래 사는 게 이런 맛이지 하며 긍정적인 기분으로 돌아선다. (그렇다 이제 좀 살만해서 하는 소리다.) 그러나 하루 종일 집에서 애 학교 보내고 밥 하고 치우고 수업하고 밥 하고 치우고 하루가 다 가고 나면 감사한 마음은 사라지고 정말 지긋지긋해지는 게 일상이다. 거기다 사춘기 딸의 감정 널뛰기까지 시작한다면 이건 전쟁이다.
딸은 사춘기를 맞이하고 있는 듯하다. 사소한 일상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왜 엄마만 안 돼? 왜 우리 집만 안 돼? 왜 나만 안 돼? 3종 세트로. 친구들은 다 간다는데, 친구들은 다 한다는데, 왜 나만, 왜 엄마만, 왜 우리 집만 안 되느냐 묻는다. 스마트폰도, 라페스타에 코인 노래방도, 파자마 파티도, 친구들끼리만 수영장 가는 것도, 왜 다 나만 안되냐고. 너만 안 되는 것도 있지만 너만 누리는 것도 있지 않냐고 말해보지만 딸에게 엄마 아빠는 세상을 모두 파렴치한으로 보는 소심한 부모의 전형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스마트폰도, 애들끼리 라페스타 코인 노래방도, 수영장도, 초 5학년끼리만 보내기엔 너무 이른 거 아닌가 싶다. 물론 대다수 무사히 잘 다녀오겠지만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게 가고 싶다면 엄마가 픽업을 해주겠다고 해도 안하무인이다. 엄마가 픽업해주는 것은 싫다. (이것은 정말 사춘기 아닌가? 학원 갈 때는 맨날 데려다 달라고 하면서!) 다른 친구들은 다 친구들끼리 다녀오는데, 왜 나만 안 돼! 왜 나만! 왜왜왜! 이러기 시작하면 이날도 끝까지 가야 한다. 지난 금요일도 그런 날이었다.
친구들과 집에서 5km 떨어진 호수 공원에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겠다고 했다. 사실 이 계절의 호수 공원은 아름답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 호수 공원까지 가는 길은 험하다. 5km 정도는 가뿐하게 자전거 탈만한 거리이긴 하지만 가는 내내 횡단보도가 계속되고, 5km에 호수 공원에서 신나게 놀고 집으로 오는 길은 게다가 오르막이어서 올라올 때쯤 지쳐서 자전거를 버리고 오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나 애나 이 길을 따라 호수 공원에 많이 다녀봤으나 둘 다 체력이 그만그만하다 보니 올 때는 녹초가 되어 쉬엄쉬엄 걷다 서다를 반복해서 온다. 이런저런 생각에 호수 공원에 가는 길 까지가 너무 위험해 가까운 집 근처에서 자전거를 타든가, 아님 정말 가기 싫지만 엄마가 보호자로 뒤에서 따라가던가(절대 너희 일에 참견 안 하마), 차로 픽업해줄 테니 호수 공원에 만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으나 드디어 시작됐다. 왜 엄마만 안 되냐고! 그러게 왜 또 나만 안 되는 걸까, 왜 다른 엄마들은 다 되는 걸까? 쿨 하게 다녀오라 하고 싶었으나 애들만 그 거리를 자전거 타러 보내는 게 영 미덥지 않았다. 그래서 또 울고,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나쁘고, 아무도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왜 나만 안되냐고 악을 쓰는 금요일, 나는 이제 정말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
울다가 머리가 아파진 딸이 수학 학원을 못 가는 바람에 일찍 저녁을 준비하고 다 먹이고 치우고 나니 6시. 아 나는 정말 이 집구석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어차피 집에 있어봐야 나는 너의 수학 푸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테고, 너는 또 하기 싫다고 노래를 부르고, 음악 듣고, 책 읽고, 놀고, 온갖 일에 다 참견하고 엄마가 꽥 소리를 질러야 수학 책을 펴겠지. 아 이제 그런 건 정말 보기도 싫다. 네가 수학을 언제 푸는지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고, 언제 푸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이제 정말 나가고 싶다.
대학 친구들에게 카톡을 한다. 나를 집에서 구출해 줄 사람! 지금 당장 나올 수 있는 사람!
다음날 스케줄 있는 어린 아들 둘을 둔 Y 만 제외하고, H와 J도 콜. 그러나 셋 다 서울을 통과해 삼각형으로 뻗쳐 살고 있느라 우리는 장소를 잡기 힘들다. 금요일 밤에 경기도를 탈출해 어디선가 모여 맥주를 한 잔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도 무서워서 우리는 그럼 서울에 방을 잡는 게 어떨까 생각한다. 그래 오며 가며 너무 힘드니 서울에 방을 잡자. 카톡으로 이태원, 마곡, 남대문, 서대문 호텔들을 비교해 서로 의견을 물었으나 카톡이 원활하지 않다. 누구는 운전 중, 누구는 퇴근했다가 먼저 나가려는 남편을 못 나가게 설득 중, 누구는 중간중간 사춘기 딸과 대화 중. 끊기는 카톡들을 연결하고, 중간에 답답해 전화하고, 그래 나가자 결정 나는 데 까지 두 시간.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결제하려는 순간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만나면 열신데, 그래 봐야 맥주 한두 잔 마시자고, 호텔에서 자기엔 자꾸 본전이 생각나. ” 그래 어디 부어라 마셔라 하는 친구들도 아니고, 이제 한 잔이면 충분히 취하고, 내일 아침 일찍 각종 픽업을 해야 하는 우리는 폭음할 수도 없다. “그래 봐야 두 잔이나 마시려나 그러려고 나가기에 좀 아깝다. 그리고 정말 오래간만에 나가는 건데 Y도 같이 가야지." 금요일 밤 탈출하자는 흥분이 사라지고 다니 만나는 현실 자각 타임.
아 중년의 아줌마들이란 신나게 두 시간 넘게 호텔을 서치 했으나 이렇게 현실로 돌아와 가성비와 가심비, 친구의 부재까지 생각한다. 조금만 더 젊었어도 오늘만 날이다! 일단 나와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던 우리에게 현실의 장벽은 이런 것이다. 정말 딱 이 집을 탈출하고 싶은 순간이었는데, 딱 이럴 때 나가야 하는데, 그래야 봐라 엄마도 친구 있거든 나갈 수 있거든! 하고 본 때를 보여주기 좋은 타이밍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금요일 밤 탈출 사건은 일단락. 그럼 우리 일요일 아침부터 만나 밤까지 놀자! 고 카톡을 마치고, 그래 나는 삼시세끼 다 차려놓고 나가겠어! 의지를 불태웠으나 토요일 이른 아침 친구 H의 카톡. “ 개학하고 계속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목소리가 안 나와. ” 월요일부터 수업해야 하는 선생님인 H는 주말에 쉬어야 한다. 4명 완전체 만남은 또 멀어져 가고, H가 캐나다에서 선물로 사 온 메이플 쿠키의 초코가 다 녹도록 넷은 만나지를 못 하고 있다.
아쉬운 대로 남편과 편의점에서 과자와 맥주를 사 와서 금요일 밤을 보내기로 한다. 그러나 일산 만 씨씨가 별명인 남편도 허리골절인채로 술을 마시니 둘이 두 캔을 따고도 다 마시지 못하고 버린다. 애꿎은 과자만 먹고 다음날 일어나 보니 몸무게만 늘어 있었다. 인간이 기분에 따라 행동하면 늘어난 몸무게만 남는구나. 기분 나쁘다고 꼭 맥주를 따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잠이나 잘 것을 하고 후회하는 아침.
4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는 언제쯤 앞뒤 재지 않고 옛날처럼 기분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을까? 바다 보러 가기 좋은 날씬데, 콜? 하는 문자를 보내고 입석 밤기차를 타고 동해에 도착하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