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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Aug 15. 2019

식탁 일기 - 간병인 K

간병인을 구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사실 나는 “에이 뭘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했다. 

젊은 사람이 정신이 말짱한데 무슨 간병인을 쓰나(척추 골절로 일어나지 못하기는 하지만) 병원도 집이랑 가까우니 오며 가며 식구들이 들락날락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40 평생이 넘도록 살면서 출산을 제외하고 병원 경험이 전무한 우리 부부에게 입원과 간병인은 너무도 낯선 세계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이미 병원 유경험자인 선배가 간병인을 꼭 써야 한다고 얘기했을 때도 귓등으로 흘려버렸던 것은 이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악몽 같은 이틀 밤을 보호자도 없이 보낸 남편은 수척해져 있었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에어컨 추위로 괴로워하는 어르신들과의 온도 차이로 이틀 동안 병원에서 땀에 절어 쿰쿰한 냄새까지 나고 있었다. 화장실을 혼자 갈 수 없다는 무서움에 다행히(?) 제대로 먹지 못해서 이틀 동안 큰일을 보러 화장실을 가지는 못 했으나 불과 이틀 전까지 사지 멀쩡 한 사람이 누워서 소변통을 쓰고 있었으니 정신적 고통도 컸을게다. 그러나 무엇보다 간병인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장운동 약’ 때문이었다. 누워만 있어 배변 활동이 원활하지 못해 처방받은 장운동 약으로 갑자기 신호가 오기 시작했고, 혼자 일어나기도 힘든 몸으로 화장실을 세네 번씩 가다 보니 허리는 허리대로 아프고, 일어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맨 정신에 싸버릴 수도 없는 형국을 맞이한 것이다. 누구는 성인용 기저귀를 얘기했고, 남편은 이 시기만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했으나 또 긴 밤을 혼자 보내며 화장실을 갈까 봐 마음을 졸이는 것 또한 못할 짓이다 싶었다.

하루에 9만 원 식대 1만 원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하루에 십만 원을 화장실만 데려가 준다고 감당하기엔 너무 큰돈이 아닌가 생각했다. 10만 원은 큰돈이고 하루에 몇 번 화장실 간다고 부축해주는 비용으로는 좀 과하지 않나 싶었던 것이다. 소개소에 전화를 할 때도 이 환자는 손이 갈 데가 없고, 화장실 갈 때만 부축을 해주면 된다고 어필을 하면서 그 정도라면 만 원이라도 에누리가 될까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고객님의 환자는 이미 덩치가 크고, 그 덩치를 감당할 간병인을 찾는 것은 하늘에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니 하루 십만 원은 오히려 적당하지 않은 금액이라는 얘기를 듣고, 우리는 조건에 맞는 간병인을 소개받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란 것을 알게 됐다.

  사실 ‘간병인’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가 그 직업을 상당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간병인이라는 이름에 적힌 프레임에 덧칠된 부정적인 이미지로 ‘간병인’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그날 뉴스에는 치매 노인을 밀쳐 허리를 골절시킨 간병인의 얘기가 나왔고, 요즘 문제가 되고 있다는 간병인 갑질 뉴스로 나는 모든 간병인을 재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간병인 프레임을 가진 내가 만난 간병인 K는 모든 면에서 나의 예상을 완벽히 깨 주었다.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나타난 그는 깔끔한 20인치 여행 가방 위에 좋아 보이는 침낭을 합체해 끌고 병실에 나타났다. 말끔한 옷차림에 윤이 나는 피부를 가지고 깔끔한 60대 남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계속되는 배변 신호로 화장실을 갈 때마다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환자와 가족에게 안심을 시켜주고, 기저귀에 일을 봐도 되고, 변이 너무 많이 나오거나 변이 나오지 않을 경우에도 본인이 다 처리할 테니 걱정 말라고 안심부터 시켜주셨다. 만약에 성인용 기저귀를 살 거면 어떤 사이즈에 어떤 모양을 사는 게 좋다고 팁을 알려 주고, 고급 정보를 알려주면서도 하나도 젠 체 하지 않으며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우리를 안심시키고 나서야 그의 짐을 침대 발치에 정갈하게 정리해두고, 네임 스티커가 반듯하게 붙은 충전기와 무선 헤드폰을 꺼내 충전을 하는 모습은 뭔가 기품 있어 보였다. 하지만 아직 만난 지 삼십 분도 되지 않았으니 이 분이 과연 이 까칠한 환자를 어떻게 대할지 상상할 수 없었고, 간병인이 하는 일에 이렇다 할 기대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점심때 남편을 맡겨 두고, 그저 물티슈와 수건이 있는 자리를 설명해드리고, 냉장고에 반찬 몇 개가 어디 있는지만 말씀드리고 집에 갔다 저녁때쯤 돌아왔을 때, 남편은 이미 다른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아파 죽겠는데 씻어서 뭐하냐는 남편을 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 구석구석 싹 씻겨 주시고, 이틀 동안 나는 한 번도 갈아 입힐 엄두를 못 낸 환자복도 새 것으로 갈아 입히고, 시트와 베개커버까지 새 것으로 싹 바꿔 놓으셨다. 이미 내가 도착했을 땐 냉장고 안의 반찬도 싹 다 데워서 한 숟가락 한 숟가락 밥을 떠 먹여 주시고, 양치까지 끝내 놓고, 환자 장롱 안에 어수선하게 들어 있던 짐들도 칼같이 정리해두고 계셨던 것이다. 단 몇 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게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고, 남편이 부탁한 일도 아니었고, 내가 기대한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환자 옆에 앉아 멀뚱히 지키다 화장실이 가고 싶다면 부축이나 해주는 게 다인 줄 알았던 내가 간병인이 한 많은 일에 1차로 깜짝 놀라고 있을 때, 남편은 또 2차 깜짝 소식을 전해주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남편은 간병인 선생님께 반한 나머지 ‘어르신이 너무 좋아, 점잖으시고 알아서 얼마나 편하게 해 주시는 모른다.’고 귓속말을 했다. 정말 조용히 앉아 있다가 필요한 순간에 짠 나타나서 (부인과 달리) 이런저런 잔소리나 군말 없이 필요한 일을 다 처리해주고 아무런 생색도 내지 않고(이것도 역시 부인과 달리) 다시 본인의 자리에 돌아가 모자라지도 과하지 않게 자신의 일들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니! 아무리 이게 직업이라고 할 지라도 이렇게 정성스럽게 자신의 일을 대하는 사람을 볼 때, 나는 좀 감동한다.

 처음 60대 남자 간병인 온다고 했을 때, 남자가 간병인 일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살짝 놀랐고, 60대라는 말에 또 살짝 놀랐다. 힘도 써야 하는 일이고, 남을 24시간 보살피며 환자 기분도 살펴야 하는 일에 남자 60대 간병인은 어떤 포지션을 취할지 쉽게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만나는 간병인 90%가 여자이니 60대 남자 간병인이 낯설었던 것이다. 이런 걱정과 우려와 달리 간병인 선생님은 오자마자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고, 우리 가족에겐 안정을 주었다. 간병인이 없었던 3일 혼자 밥 먹기도 어려운 남편의 밥때에 맞춰 하루에 병원을 세 번씩 오며 가며 각종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던 내게 간병인 선생님은 그야말로 구세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분명 남편을 위해 모신 간병인이었으나 그 안정감은 나와 딸에게까지 전염됐던 것이다. 아침에 조금 늦잠을 자고 일어나 병원에 가도 됐고, 중간중간 수업이 있을 때도 굳이 병원에 들르지 않아도 됐다. 저녁때쯤 필요한 것과 반찬을 좀 가지고 가서 굿 나이트 인사만 하고 와도 예전처럼 불안하지 않은 것이다. 그 중간중간 사이사이 병원에서 오로지 견뎌야만 하는 그 수많은 시간들은 모두 촘촘히 간병인 선생님이 다 지켜주고 있었고, 나로서는 엄두가 안 나던 많은 일들 그 큰 등치의 환자가 큰 일을 보는 사이 물수건에 물을 묻혀 온 몸을 다 닦아 주고, 어느 날은 때수건으로 때까지 밀어주었다, 샴푸를 가져다 머리까지 감겨 주셨던 분이 바로 이 간병인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우왕좌왕 처음 겪어보는 병원 라이프에 환자복은 어디에 있고, 간호사에겐 뭘 부탁하고, 병실에 있는 동안 필요한 물건은 무엇이고, 심지어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의사보다 친절하게 뼈 붙는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움직여야 아프지 않게 움직일 수 있는지 노하우를 알려준 것도 다 이 간병인 선생님이었다. 그리하여 초반 2주간 병원 생활에 간병인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우리 가족이 지금쯤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2주간의 간병 생활이 끝나고 어제 간병인 선생님이 댁으로 돌아가셨다. 처음 오셨을 때처럼 깔끔한 모습으로 20인치 여행 가방에 침낭을 야무지게 동여 매고, 먼지 하나 남기지 않은 채로. 2주 만에 많이 좋아졌다며 이제 나 없어도 혼자 씻고 다닐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어서 나으라는 덕담까지 하신다. 부인인 나도 하룻밤 자기 어려웠던 환자 옆 간이침대에서 열네 밤을 주무시고, 새벽마다 일어나 씻기고 닦이고 먹이고 자식처럼 돌봐주신 선생님은 마지막 날까지 나 있을 때 씻어야 한다며 깨끗하게 씻기고, 수건으로 발가락의 때까지 사이사이 깔끔하게 닦아 주셨다. 내 자식한테도 저렇게까지는 못하겠다 싶은 일들을 불평도 생색도 하나 없이.

 간병인 어르신이 떠나시고 이젠 식구들이 드나들며 이런저런 환자 뒤치다꺼리를 한다. 이제 혼자 씻을 수도 있으니 아주 소소한 것들 뭐 냉장고에서 반찬 몇 개 꺼내 주고(허리를 숙일 수 없음), 씻을 때 환자복과 수건 좀 챙겨주고, 손이 닿지 않는 물건들 집어 주고 뭐 이런 정말 소소한 일들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그렇게 정성껏 돌봐보지 않은 식구들의 서비스는 확실히 전문가의 그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건지 “아 어르신은 이렇게 해주셨는데,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면 훨씬 낫단 말이지. 이거 무슨 힐튼 호텔에 있다가 장급 여관에서 자는 기분이구만. ” 하며 간병인 선생님의 빈자리를 얘기한다. 또다시 이런 일로 만나면 안 되겠지만, 병원에서 나가면 꼭 한 번 뵙고 싶은 간병인 선생님. 정말로 감사하고, 고마웠습니다. 전문가만이 가진 디테일도, 세심한 배려도, 헌신적인 보살핌, 영혼을 팔지 않는 서비스도 모두 모두 잊지 못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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