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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Sep 18. 2019

식탁 일기 - 어차피, 내 맘대로 안 됩니다.

9월 18일 자정 무렵 냉장고가 사망했다.

혼수로 사 온 나의 냉장고가. 2007년 6월부터 단 한 번의 고장도 없이 잘 쓰고 있던 냉장고가,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고 갑자기, 사망했다.     

자정을 삼십 분 정도 앞두고 갑자기 누전 차단기가 내려갔다.

나와 딸은 이미 잠들어 있었고, 집안엔 신랑과 TV, 게임기와 와이파이 수신기만이 깨어 있었는데 누전이라니. 아무리 집구석구석을 뒤져봐도 전기가 빠져나갈 구석이 없는데, 갑작스러운 누전에 기계실에 전화를 해보니 다행히 비상근무자 전화를 받았다. 그가 침착하게 집 안에 10년이 넘은 오래된 가전제품이 있냐고 했을 때, 우리 집에 있는 모든 제품은 모두 10년이 넘었음을 얘기했더니 그렇다면 이런 누전은 당연한 일이라고 얘기했다. 냉장고, 세탁기, TV, 전기레인지 등 무엇이 누전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라는 얘길 듣고, 나는 제발 냉장고만은 아니길 바랐다.( 무엇보다 그 냉장고엔 남편 부러진 허리뼈가 잘 붙으라고 하루종일 고아 얼려둔 도가니탕이 들어 있단 말이다.) 그러나, 역시나, 그의 누전 감지장치에 잡힌 것은 냉장고였다. 하필 냉장고라니. 대체, 왜. 게다가 나는 두 달 후면 이사를 앞두고 있는데. 난생처음 새집 이사에 흥에 겨워 추석 연휴 내내 동생과 온갖 전자제품 대리점을 돌아다니며 냉장고 쇼핑을 하고 두 달 후 새집에 어울릴 냉장고를 찾고 있었는데,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고 이렇게 어이없게 바로 오늘 밤 냉장고가 사망하다니.

 그 새벽에 AS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AS 예약을 했더니 당장 가능한 전문 기사는 다음 주에 배정 가능하다는 답변만 나오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AS 센터 콜센터에 전화를 하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물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연결이 안 되면 말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그 새벽에도 비상근무자는 전화를 받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 야심한 새벽에 비상 근무자가 전화를 받아 나의 에어컨 사망 소식에 씁쓸한 위로를 표해주며 그 역시 가능한 기술자는 당장 다음 주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얘기해줬다. 홈페이지에서 안내받은 것과 똑같은 답변이지만 그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었기에 나는 정말 슬픈 목소리로 우리 집엔 김치 냉장고도 없어서 지금 냉장고 안의 모든 음식이 점점 녹아 가고 있다고, 제발 내일 누구 한 명이라도 오실 수 있게 다시 한번 부탁을 드린다고 읍소를 하며 그의 선처만을 기다린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으면서도 과연 다음 주에나 올 수 있다는 그 기술자가 과연 빨라야 언제쯤 우리 집에 올 수 있을까 생각하며 반쯤 포기하고 자고 일어나니 아침 9시, AS 센터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담당자가 오늘 오후에 방문할 수 있을 거라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자정부터 냉기를 잃어가고 있는 냉장고 안의 식재료가 다 상해버리기 전에 이 냉장고 사건을 매듭지어야 했다. 오늘 조조 영화를 예약해둔 남편과 나는 영화 보기 전 근처 매장 두 군데에서 다른 냉장고 견적을 받고, 혹시 AS 받지 못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냉장고 속에 식재료를 최대한 꺼내서 과식을 하며 냉장고 속 음식물을 처리하고 있었다. 오후 4시, AS 기사는 약속한 시간에 딱 도착해서 냉장고의 메인 부품인 컴프레셔를 25만 원을 주고 교체해야 한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25만 원과 12년, 두 달 후 입주를 저울질하다가 새 냉장고 구입을 결정한 것은 오후 5시. 부랴부랴 지금 당장 주문하면 내일까지 배송받을 수 있냐는 질문에 당장 주문을 넣고, 물류센터에 OK 사인이 뜰 때까지 기다려 봐야 한다는 말에 카드를 들고, 대리점으로 나가 냉장고 결제처리를 한 것은 5시 30분. 과연 내일이 될지 내일모레가 될지 물류센터 사정에 따라 배송일자는 달라질 것이라는 안내를 받고 집에 와서 다시 냉장고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깜짝 놀라는 나, 세상에 우리 집 냉장고에 이렇게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단 말이냐. 딸애 없을 때 혼자 먹으려고 남겨 둔 초콜릿 아이스크림은 냉동실 저 쪽 뒤에서 처참하게 녹아 있었고, 소분해서 넣어둔 치즈며 각종 소스는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나중에 먹겠다며 잘 넣어둔 빵이며 떡은 과연 언제 적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각종 김치 양념들도 버리기 아까워서 알뜰살뜰 넣어둔 나의 절약정신에 감탄하다 그 냉장고 속에 넣고 까맣게 잊어버려 이제 원형을 찾을 수 없는 식재료들을 음식물 쓰레기 통에 버리며 음식 쓰레기 지옥에 떨어져 내가 버린 음식을 먹게 돼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대체 이게 돈으로 얼마며, 몇 식구가 먹을 것인가, 녹아 버리고, 상해 버리고, 기억을 못 해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 나니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꾸역꾸역 버리고, 저녁 할 식재료들 정리하고, 먹고 치우니 7시 52분. 카톡~ 알림 문자에는 ** 고객님 주문하신 ** 냉장고가 내일 배송됩니다.라는 반가운 메시지. 세상에, 냉장고도 이렇게 바로 배송되는 세상 속에 살고 있구나. 하는 세 번째 놀라움.

 그리하여 지난밤부터 오늘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된 냉장고 구입기. 분홍 냉장고와 까만 냉장고, 실버 냉장고와 5 도어, 4 도어, 양문형, 정수기, 쇼케이스, 홈바 등등 온갖 냉장고 사이에서 헤매며 입주하면 새로 바꿀 냉장고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인간의 일이란 당장 오늘 일도 알 수 없는 것, 그 숱한 고민들을 뒤로하고 바로 배송 가능한 냉장고를 고르게 될 것이란 생각을 그때는 왜 못했냔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냉장고 고민은 이제 끝났고, 김치 냉장고와 소파, 책꽂이와 식탁, 매트리스와 식기세척기, 물걸레 로봇만 고민하면 되겠구나. 하루하루 계속되는 고민과 선택, 하지만 매번 고민이 무색한 선택들을 하며, 이렇게 세상이 내 맘대로 되는 게 없구나 하는 정말 뻔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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