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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Jan 18. 2019

독서 일기 -   정세랑 <옥상에서 만나요>

2018년 가을에 처음 만난 작가 정세랑.

사실 그 전까지는 그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이미 나도 나이를 먹어 골라드는 책이 알던 작가들에서 딱히 벗어나지 않게 되니, 데뷔한지 8년이나 된 작가를 이제야 만나게 됐다. 낯선 이름이기도 했고, 정.세.랑 할 때 느낌이 너무나 발랄하여 젊은 애들 얘기나 쓰는 작가인줄 알았건만.

지인의 추천으로 만난 <피프티 피플>을 읽고 완전히 빠져버렸고, 2019년 새해 첫 달, 또 나를 상큼하게 감동시킨 정세랑의 <옥상에서 만나요>로 독서일기를 시작할까 한다.


사실, 2018년 나의 새해목표는 ‘독서 일기’ 쓰기였다. 역시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고민을 했던지라 ‘뭐라도’ 써보자는 자신과의 약속으로 ‘독서 일기’를 썼는데, 작년 한 해 동안 열심히 읽긴 했으나 노트에 적힌 책은 40권 남짓. 게다가 11월 부터는 연말 파티 & 해장하기의 스케쥴로 독서일기는 11월에서 멈춰버렸다. 그래도 40권이나 썼다며 위안해보지만 2019년에는 분발해보겠다는 인간적인 약속과 결심을 하며...


<옥상에서 만나요>는 2010년부터 2018년까지 발표한 정세랑의 단편 9개를 모아놓은 소설집이다. 처음 <피프티 피플>을 읽고, 너무나 빠져 몇 날을 책 속의 종합병원 근처에서 배회했던지라 이번 소설집 발표 소식은 미세먼지 가득한 겨울에 만나는 한파처럼 상큼한 소식이었던 것이다.


<웨딩드레스44 >

수록된 첫 단편. 44사이즈 웨딩드레스의 이야기인줄 알았으나 그럴수도 있고, 웨딩드레스를 거쳐간 44명의 신부들의 이야기를 짧게 풀어낸다. 짧게 풀어냈으나 전혀 부족하지 않은 이야기. 우리 사회의 결혼과 여성이 느끼는 결혼 제도의 다양한 감정과 불합리한 부분을 경쾌하게 그려낸다. ‘결혼’이 이토록이나 ‘모순’적인 것임을 대놓고 얘기해도 전혀 불편하지 않게. 결혼 생활 10년차, 그때 누가 나에게 ‘결혼’은 이런것이라고 정세랑 작가처럼 얘기해줬으면 ‘결혼’에 대한 환상은 조금 뒤로하고, 좀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선택하지 않았을까 생각과 함께 무조건 결혼은 해야해, 혹은 결혼은 무덤이야로 끝나지 않는 결혼에대한 많은 고민들을 이 책을 읽고 함꼐 풀어나가도 좋겠다.

* 여자는 고전문학 전공자였는데, 고전문학 속 영웅들이 대다수 고아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 결혼생활 안에서 너를 변호해줄 사람은 없어. 너밖에 없어. 그게 안되면 언니한테 전화해.

* 결혼생활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잔잔하게 굴욕적이야. 내 시간, 내 에너지, 내 결정을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아. 인생의 소유권이 내가 아닌 사람들에게 넘어간 기분이야.


<효진>

부모에게 효를 다하라고 붙여진 이름 ‘효진’으로 사는 여자 이야기. “딸을 공부시키면 뭐하나, 왜 오빠보다 네가 더 공부를 잘 해야하니, 집안에 어른이 아프면 여자가 뒷바라지 해야지.”를 강요하는 집, 가족, 사회를 뒤로하고, ‘도망치듯’ 사는 효진이 절친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한다. 진짜 내 친구 효진이가 전화한 듯,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효진이 오빠보다 공부를 잘해서 서울로 대학을 가고, 번듯한 남자친구를 만나고, 대학원을 가고, 유학을 가고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이야기인데 담담한 효진이의 목소리가 읽는내내 귀에서 맴돈다.

“그래 효진아 너 그때 그래서 좀 힘들었다.” 하고 나까지 속엣말을 하며. 생각해보니 효진아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었지, ‘투쟁’까지는 하지 못해도, 수많은 고정관념과 타인의 시선에서 ‘나’를 찾아보려 했었지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효진아 그 시간들이 쌓여 아마 오늘 우리가 이렇게 달콤한 베리타르트 레시피를 얘기할 수 있었던게 아닐까? 그곳에서 생활은 적당히 지치고 힘들지만 너라면 그 다음 얘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안심이야.


<보늬>

밤의 속껍질, 반투명한 속살을 이름으로 가진 나의 언니 ‘보늬’. 똑똑하고 일도 잘하고 야무진 언니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돌연사한다. 돌연사라니 시집도 안간 처녀가, 어젯밤까지 둘이 발 없는 기모레깅스를 주문했는데,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기모레깅스보다 갑작스럽게 언니가 죽은 것이다.

황망히 가족을, 지인을, 누군가를 잃어버린 사람은 안다. 현실은 계속 되는데, 이 죽음은 너무 비현실이라는 것을.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그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데는 시간이 약이라지만 <보늬>의 동생 보윤과 친구들은 다른 방법을 선택한다.

‘돌연사.net'.

이쯤에서 나는 감탄한다. 돌연사를 돌연사.net으로 만드는 작가라니. 언니의 돌연사가 ‘돌연사.net’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돌연사.net에는 알 수 없는 죽음들이 기록된다. 종이박스 공장에서 혹사당한 외국인 노동자, 회사 체육대회에서 쓰러진 사람, 실험실에서 쓰러진 대학생, 과로, 스트레스, 인격모독, 경쟁, 착취, 질병, 운동부족, 폭음 등 그럴만한 이유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은 많은 사람들의 돌연사가 쓰여지고, 소설은 언니의 갑작스런 죽음에서 사회의 죽음으로 뻗어나간다. 그 우중충한 ‘돌연사.net'이 만드는 우중충하지 않은 이야기, ‘요즘 젊은이들은 이렇게 고통을 또다른 언어로 만들어낼 수 있구나.’ 생각하며 슬픔과 고통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본다.


<옥상에서 만나요>

나에게도 옥상이 있었다.

200원짜리 밀크커피를 뽑아서 올라가던 곳, 누구는 줄담배를 피워대고, 누구는 사무실의 악질들을 돌아가며 소환하다 “내려가서 일이나 하자.”로 마무리 되던 곳.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시작한 사회생활은 녹녹하지 않았다. 주인공처럼 혈액투석하는 아빠에,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고생 중인 엄마, 우울증인 남동생은 없었지만 어른으로 책임을 다하는 사회인이 되기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내가 감당해야할 이런저런 불합리함들을 맞서기엔 능력 부족이요, 자신감도 부족이니 그저 참는 수 밖에 없을 때, 운명의 마녀들같은 세 언니들이 나에게도 있었다. “운명의 마녀들처럼, 다정하게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엉킨 실 같은 매일매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해주는” 언니들. 운명의 마녀들이 아니었다면 뛰어내릴 수 밖에 없는 그 옥상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친애하는 언니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새로운 운명을 갈구하다 고대의 주문서를 찾아낸다. 당황스러운 주문과 사이코 같은 비법이지만 시키는 대로 하면 운명이 바뀐다니, 주문을 외우고 차례로 시집을 간 언니들을 보며 주인공도 미래의 남편을 소환한다. 언니들처럼, 번듯한 미래의 남편이 소환될 거라 생각했는데, 옥상에 소환된 것은 남편이 아닌 멸망의 사도라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 하지만 이 멸망의 사도는 정말 남편인 듯 ‘나’의 근심 걱정을 쪽쪽 빨아 먹고, ‘나’의 지인들과 ‘나’와는 상관없어도 전국각지에서 공수해온 걱정근심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쪽쪽 빨고 무럭무럭 성장하여 옥상에 어울리는 무언가가 되어간다.

그리고 ‘나’는? 옥상에 올라가기 전의 나와 옥상에서 뛰어 내리고 싶었던 나, 옥상에서 언니들을 만난 나는 사실 같은 ‘나’이지만 이제 나처럼 뛰어 내리고 싶은 누군가를 위한 자리를 만든다. 소설에서처럼 멸망의 사도는 만나지 못했지만, 운명의 마녀처럼 옥상의 세언니를 가진 나처럼, 우리처럼 말이다.


<해피 쿠키 이어>

제목으로는 도저히 무슨 얘기인줄 알 수 없으나, 읽다 보니 그 제목이 이런 뜻이었구나 싶은데 우리말로 하면 < 행복한 과자 귀> 정도라고 하면 될까? 이게 무슨 해괴한 발상일까 싶지만 읽어보면 행복한 과자 귀는 해괴하지 않고, 너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중동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인데 의대생인 이스마힐이 만난 친구, 한국, 애인이야기. 한국 여자랑 연애를 해서 한국말이 유창해진 이스마힐이 한국에서의 시간을 추억하며 얘기가 시작된다. 중동의 기름부자가 아니어서 한국에 온 사연, 한국 친구네 과자 공장에 가서 사고를 당한 사연, 한국에서 콩 알레르기를 갖고 살아가는 여자를 만난 사연, 그 여자가 죽을까봐 콩이 안 들어간 요리를 한 사연, 그리고 다시 중동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사연이 이어진다. 사고로 귀가 없어지고 과자 귀가 자란다는 엉뚱한 설정인데도 전혀 억지스럽지 않고, 과자귀의 정체를 아는 순간 ‘푸하하’하고 폭소할 수 있다. 중동에서 온 남자가 한국에 오면 이런 느낌일 수도 있겠구나, 중동에서 온 남자는 사귀어 본 적 없지만 남자친구는 이스마힐 같은 사람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과자귀가 생긴 남자, 있을 수 없는 얘기지만 이스마힐에게 한국에서의 시간, 한국에서의 연애는 어쩌면 ‘과자귀’ 보다 더 꿈같은 얘기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타지에서의 연애와 일상이란 이런 ‘과자귀’ 같은 면이 있을테니까. 그래도 한때나마 ‘과자귀’를 가졌던 이스마힐은 행복했을 것이란 생각과 함께.


9편 중 5편에 관한 소개는 여기까지.

이 외에 이혼을 마치 파티처럼 만나게 되는 <이혼 세일>, 다국적 공동체의 모범적인 모습은 이렇지 않을까 싶은 <알다시피 은열>, 거리에서 살해당해 뱀파이어가 된 여자 이야기 <영원히 77사이즈>, 이런 귀여운 전쟁 얘기가 다 있나 싶은 <이마와 모래>. 수록된 모든 작품들을 한 줄 한 줄 아까워하며 읽었다.

실화는 아니지만 어차피 이것은 픽션이지만 주인공 하나하나를 이렇게 실감나게 만들어 준 작가에게 고마움과 존경을 담아. <피프티 피플>을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라는 추천과 함께 작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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