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푸레나무 식탁 Jan 28. 2019

식탁 일기

- 영화 <가버나움>과 자기 복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어요)


인생의 어느 시점을 다시 돌이켜야 현재의 내 모습이 바뀔 수 있을까? 의미 없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과거의 나의 어떤 선택이 나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는지 생각해 본다. 결혼을 결심한 순간? 비정규직 노동자인 직군을 직업으로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 순간? 대학을 결정하는 순간? 고등학교 특별 활동부를 선택하는 순간? 지나간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을 복기해보지만 돌이켜 보면 잘못된 선택이었더라도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어차피 나란 인간의 영혼이 바뀌지 않는 이상, 같은 상황에서 선택은 비슷한 지점에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이 계속 이런 패턴이라 해도...

 영화 <가버나움>을 보고, 인생의 선택의 순간을 떠올린 것은 지옥도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삶을 어디서부터 되돌려야 살 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자인이 집을 나오기 전? 라힐이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기 전? 자인의 엄마가 11살 된 딸 사하라를 시집 보내기 전? 자인이 라힐의 아들 요나스를 팔기 전? 영화를 천천히 되짚어가며 자인의 인생을 구원해줄 단 하나의 실마리를 찾아보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자인에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다.


 멀쩡한 부모가 있지만 출생신고도 되어있지 않은 아이 자인, 어린 동생들이 줄줄이 딸린 자인은 레바논 베이루트 빈민가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마약 쥬스를 만들어 팔고, 동네 가게의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하고, 빈 시간엔  동생들과 거리에서 과일 쥬스를 파는 어린 생활인이다. 학교에 가고 싶지만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와 아무리 일 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엄마 아빠가 11살 동생 사하라를 식료품 점 주인에게 시집 보낼까 노심초사하는 자인의 삶. 여기서 과연 자인이 어떤 선택을 잘못해서 삶이 이토록 시궁창이 된 것일까? 자인과 가족의 삶이 시궁창이 된 것이 그들의 잘못 때문인 것일까?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영화일 뿐이라는 변명을 해봐도 마음이 편치 않다. 감독이 빈민가의 아이들을 만나며 4년간의 자료 조사를 통해 실제로 길거리 아이들을 캐스팅해 그들이 겪었음직한 일들을 소재로 만든 영화라 하니 이 영화의 끔찍하기만 한 생의 순간들을 다 만들어낸 것이라 치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2시간 여가 넘는 러닝타임 내내 세상을 잃은 눈빛으로 자신의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 보지만 단지 태어난 죄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가혹하다. 그저 복이 없어서, 노력하지 않아서, 게을러, 서 잘못된 선택을 해서라고 인간의 삶이 꼬이는 수많은 원인을 가져다 붙여도 자인은 죄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 <가버나움>을 보며 나의 선택과 상관없이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생각해본다. 더 이상 내려갈 수도 없는 끝에 매달려 사는 자인을 보며 내 삶을 위안하지는 않았다. 속 편하게 그게 다 운명, 이라고 하긴 자인의 고통이 너무나 선명해서 눈을 감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된 친구와 자기 복에 관해 얘기한다.

집값이 일 년 만에 사억이 오른 것은 남의 복, 그 집을 사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내 복, 상위 일프로 두뇌를 가진 자식을 낳은 것은 남의 복, 그저 평범한 자식을 키우는 것은 내 복. 어차피 남의 복과 내 복은 겨눌 수도 없을 만큼 다르다고. 나이가 들어보니 그래 이 복이 이만해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고. 어차피 가지지 못할 것이니 마음이라도 편하게 먹어야 한다고 그래서 우린 늘 이런 선택을 하고 이런 후회를 한다고. 그래서 남들처럼 어마어마한 복이 ‘짠’ 하고 내 인생에 나타나진 않는 것 같다고.  


하지만 <가버나움>의 자인에겐 우린 어떤 위로를 해줄 수 있을까?

오십억 인구 중에 삼십억이 불행해야 하는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다면 네가 최하로 얻어걸렸다고, 이번 생은 망했으니 그저 버텨보라고 하기는 너무 염치없는  것 아닌가?

자인에게, 라힐에게, 요나스에게, 사하리에게 이 운명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덧붙이며:

- 실제로 길거리를 떠돌던 주인공들의 영화 속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때가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공허한 눈으로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자인이 영화 속에서 웃는 장면은 딱 두 번뿐인데, 그 0.5초도 안 되는 순간이라도 자인을 웃을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감독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법정에서 자인의 엄마는 우리도 이렇게 살고 싶은 게 아니라고, 당신도 우리처럼 살면 일초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이라고 항변하는데, 누가 자인의 엄마에게 돌을 던지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넘치지만 쓰면 쓸수록 스포일러가 되는 관계로 지인들과 함께 보고 감상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작가의 이전글 독서 일기 -   정세랑 <옥상에서 만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