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고도 없는 곳으로 이사 온 지 한 달째.
서울 옆, 택지지구 분양이라는 것이 그러하듯이 우리 가족은 인프라로 무장한 신도시 한복판에서 진흙밭과 다름없는 새 아파트 한가운데로 내동댕이 쳐진 듯했다.
아직 도로도 정비되지 않은 길을 뚫고, 입주와 함께 작은 편의점이 오픈될까 말까 할 곳으로, 병원은 어디가, 약국은 어디가, 과일은 빵은 커피는 어디가 좋은지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처음엔 그간 다니던 딸아이 학교를 데려다주느라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 왕복 픽업 60Km를 하느라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지난주 학교 방학이 시작되고, 아침에 눈을 뜨고 딸아이는 학교도 학원도 갈 곳이 없고, 나는 가르칠 아이도, 안부를 물을 이웃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새 판을 짜고 일상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옛집에선 당연하던 일들을 하나하나 알아보고 새롭게 시작하려다 보니 성인인 나도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 이럴 거면 하지 말까 싶기도 하고 자잘한 스트레스가 밀려오기 시작한다. 무슨 해외 이민도 아니고 그저 동네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도 결정해야 할 일들이 이렇게나 많은 것인지. 거기에 하나 더 해 내성적 성격인 우리 딸은 새 학원을 선택하기에 앞서 엄청난 떨림과 두려움과 무서움을 장착하고 이사 오기 전 동네와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어제까지만 해도 하루에 한 번씩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새 학원이 뭐라고, 너 무슨 엄마 아빠 두고 유학이라도 가는 거니, 하루에 두세 시간 공부할 학원 결정하는 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 많냐고 속으로 생각하긴 하지만 이제 13세 인생에 새 환경은 처음이니 최대한 존중하는 재스쳐를 보여주었다. 그래, 딸아 가서 안 맞으면 안 하면 되지, 담대한 마음을 가져라, 해보지 않으면 좋은지 아닌지 몰라, 하기 전이 제일 스트레스가 많아, 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야. 라며 용기를 내보는 말들을 들려주는 데, 사실 이 얘기는 딸이 아닌 나에게도 절실한 것이리라.
이제 여기서 책 읽기 수업할 새 아이들을 만날 준비도 해야 하고, 서류 작업, 동네 분위기에도 적응을 해야 하고, 내가 다닐 발레 학원도 찾아야 하고, 가깝고 주차 편한 도서관과 분위기 좋은데 커피 맛도 좋은 카페와 가격도 저렴하지만 맛도 좋은 빵집, 친절하고 실력 좋은 세탁소와 걷기 좋은 길들을 찾아봐야 한다. 혼자 하는 일들은 어떻게든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드는 한편, 누구를 만나고 관계하고 하는 일들은 자꾸 주저하게 된다. 40이 넘었지만 아직도 인간관계는 서툴러서, 겉으로는 성격 좋아 보인다는 인상에 금방금방 친구를 사귈 것 같지만 인상과 달리 사람 사귀는 데 오래 걸리는 나란 사람이 과연 이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관계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새로운 것은 설레기에 충분하지만 두려움과 떨림,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그러나 적당한 긴장과 스트레스가 동반해야 일상도 규모 있게 운영된다. 하지만 때론 그 스트레스와 긴장을 이겨내기 귀찮아서 지레 포기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라는 핑계를 대며 새로운 일에는 적당히 빠지며 아무 일도 계획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이란 내겐 아무 쓸 것도 없는 삶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올해는 난생처음으로 ‘글쓰기 모임’이라는 것에 나가보기로 했다. 이제까진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고, 모르는 사람과 내면을 나누며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 낯선 사람들을 만나 자기소개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거기에 그냥 조용히 쓰다 보면 누군가 알아주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지난 1년 동안의 브런치 활동을 하며 느낀 것은 “내가 무슨 대단한 작가도 아니고 조용히 쓴다고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였다. 지난 일 년간의 글쓰기는 가족에게도 민망해서 비밀로 쓰던 글쓰기였다. 하지만 2020년엔 좀 더 용기를 내어 티 내고 써보기로 한다. 물론, 이렇게 티 내고 써도 안 되면 말고, 하는 정신을 장착하고. 적당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글쓰기를 만나 보기로 한다.
나는 지난주까지 갈까 말까 등록할까 말까를 고민했던 글쓰기 모임에 계좌 입금을 하고, 어제 딸애는 할까 말까 고민하던 영어 학원에 등록했다. 번뇌로 가득하던 할까 말까 가 무한 반복 되는 고민을 끝내고 나니 오히려 더 자유롭다. 이제 하면 되고, 잘하려 노력해보면 되고, 그래도 안 되겠으면 말면 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