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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May 22. 2020

식탁 일기 - 질투는 나의 힘

 10년도 넘게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살았다. 고백하건대 번뜩 정신이 들어 뭐라도 쓰겠다고 노트북을 켠 이유는 그녀 때문이었다. 한때 같은 방송사 사무실에 앉아 있던 그녀가 소설가로 등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소설 제목이 뭔지, 단편인지 장편인지, 출간을 했는지 안 했는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저 나처럼 일개 작가인 줄 알았던 그녀가 삼백 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을 쓰고 상도 받고, 출간을 했다.나의 마음 저 밑 구석 어디선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택배가 오는 시간을 기다릴 수도 없어 당장 동네 서점으로 가서 그녀의 소설을 사서 단숨에 읽었다. 아, 뭐야 재밌네. 

 그때 나의 머릿속엔 기승전육아 밖에 없을 때 였다. 네 살짜리 딸을 거의 혼자 키우다시피 하던 시절이었다. 건너 건너 들은 바로는 그녀 역시 나보다 조금 늦게 결혼해 우리 딸 보다 조금 어린아이를 키우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대체 언제 애를 키우고 소설도 써서, 등단을 할 수 있었던 거지? 나는 며칠을 그녀의 소설 리뷰를 찾아 샅샅이 읽었다. 세상의 모든 위로의 말을 그러모아 활활 타는 나의 질투심을 다독거렸다. 그렇다고 내가 소설가가 꿈은 아니었잖아. 어차피 내가 탐내던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당장 나는 소설을 쓸 여력도 없잖아. 아직도 새벽에 백 번을 넘게 깨는 딸애를 끌어안고, 그저 잠이나 푹 자보는 게 소원인 내가 무슨 소설을 쓰냐고. 

 그녀의 등단 사건은 쇼킹했으나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옆자리 작가였던 그녀가 소설가가 된 이벤트는 며칠간 질투를 동반하고 사라졌다. 그랬군, 나는 이렇게나 대인배였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점 신간 코너에서 그녀의 다음 소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무방비상태인 나는 서점에서 그녀의 책을 급작스럽게 만나고   엇! 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서점 한 구석에 붙박이처럼 서서 단숨에 그녀의 책을 집어삼켰다. 세상에, 아직까지 쓰고 있었네! 애도 어리다면서! 나는 이제 겨우 딸을 학교에 입학시키고 한 숨 돌렸는데, 그저 집, 마트, 놀이터를 오가는 게 다였는데!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이번 책은 그냥 소설책이 아니었다. 발매와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연일 뉴스와 방송에 등장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십 만부, 이십 만부, 삼십 만부..... 백 만부라고? 백 만부면 인세를 권당 천 원씩만 따져도 이게 얼마야. 인터뷰에 강연에 영화 판권까지. 그녀는 그냥 소설가가 아니라 이제 재력을 겸비한 소설가까지 되었다. 내가 갖고 싶은 두 가지를 다 가진 사람이 바로 옆자리 앉아 있던 그녀였다니. 나는 또 며칠 질투의 화신이 되어 속을 부글부글 끓였다. 이 질투가 샘솟는 마음을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어 안달을 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은 그 작가가 바로 그녀라고, 그녀가 그 시절 내 옆에 앉아 있던 바로 그녀라고. 하지만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내 그녀를 모르는 척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그 책 읽어봤어?라는 타인들의 대화를 그저 귀가 쫑긋해서 듣고만 있었다. 그녀 이름을 절대로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부러우면 지는 거래서 대외적으로 나는 그녀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너무나 부러웠다.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가진 작가라니. 나는 너무나 과분해서 꿈조차 꿔보지 않은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글의 언저리를 서성거렸으면서도 내가 생각한 성공한 작가의 최대치는 그저 내 이름으로 된 책 하나 있었으면 하는 소박한 거였으니까. 그래서 어디 가서 작가라고 불려도 민망하지 않을 정도의 작가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야말로 책 한 권으로 대박을 터뜨린 그녀의 행보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한동안 나는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는 기사들을 빼놓지 않고 읽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이 또한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건 그녀의 몫 아닌가. 질투에 눈이 멀어 세상의 덧셈과 뺼셈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 부스럭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비로소 잠들어 있던 나의 노트북을 깨웠다. 베스트셀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녀가 그렇게 부러우면 최소한 나는 뭐라도 쓰고 있어야 되는 게 아닌가. 그녀를 그렇게 질투하면서도 나는 내내 한 줄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뻔뻔한 인간이라니. 

 나를 움직인 것은 팔 할이 질투였다. 부동산 하락론자였던 나는 집을 왜 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집값이 말이 되냐며 우리는 노마드처럼 전셋집을 전전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부동산으로 돈 버는 시대는 지났다며 집 사라는 일가친척 지인들의 권유를 모두 못 들은 척했다. 그러던 내가 아, 집을 사야겠다 했던 순간도 절친한 친구의 새로 분양받은 아파트 입주 집들이에서였다. 내 집이 주는 안락함이라는 것이 그때야 보인 것이다. 내내 운동 하나는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늘 귀찮아서 미루던 내가 발레학원에 내 발로 걸어갔던 이유도 친구 하나가 운동복을 입고 보낸 사진 때문이었다. 그랬던 발레를 8년이나 취미로 하고, 멋모르고 아파트도 분양받아 내 집 마련의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을 보면 나란 인간은 어쩜 이토록 가벼운 건가 싶기도 하다.


 질투란 무엇인가. 남을 부러워하는 감정, 또 그것이 고양된 격렬한 증오나 적의.라고 국어사전에 쓰여있다. ‘남을 부러워하는 감정’이야 하루에도 몇 번을 느낀다고 인정하지만 ‘그것이 고양된 격렬한 증오와 적의’로 나타날 때는 그 화살이 늘 남편을 향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결혼과 임신, 출산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경단녀가 된 나는 늘 자기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돈도 벌고, 가정도 있고, 아내도 있는 그를 격렬하게 질투했다. 나는 하루하루 늙은 애 엄마가 되어 가고 있는데 이제 인생의 황금기를 맞고 있는 듯한 남편을 보며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질투했다. 그의 직장, 직업, 월급, 일, 출장 내가 갖지 못한 모든 것을 당연하게 갖고 있는 그를 보며 나는 늘 배알이 꼴렸다. 게다가 그의 부인은 속을 썩이지도 않고, 이렇게 살뜰히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그의 딸을 키우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그리 부러워할만한 것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난 그의 회의와 회식, 일과 출장 모두를 질투했다. 게다가 굳이 그 질투를 감춰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 나는 늘 남편의 경사에 반쯤은 삐딱해져 대꾸했다. 그래, 잘 됐네, 좋겠다. 

 오래된 친구들에게도 가끔 불쑥불쑥 감정이 솟아날 때가 있다.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이이지만 때론 내가 갖지 못한 타인의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식탁에 올려두고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해준 건 없는데 공부도 운동도 잘하는 남의 집 아들 딸, 돈도 잘 벌고 자상한 남의 남편, 건강한 남의 부모님, 따박따박 친정엄마가 해다 주는 반찬, 고민하지 않고 백화점에서 카드를 꺼내는 대범함 등등. 이런 찰나의 질투들은 사실 파도의 작은 물방울 같은 것들이어서 나는 잠시 파도에 휩쓸리다 늘 제자리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저 옷이 잠깐 젖었을 뿐, 나를 바다에 빠뜨릴 만큼 쓰나미 같은 파도가 불어 닥친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런 찰나의 질투도 쉽게 찾아오지는 않았다. 내가 부러워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그들이 그만한 대가를 치른 것들이고, 애초부터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도 부지기수다. 무턱대고 부러워해봤자 나만 다치는 일. 나이만큼의 훈련의 결과일까? 쉽게 부럽지도, 탐하지도 않는다. 이제는 그저 내가 가진 것들을 잘 다듬고, 감사해야 할 때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던 내게 최근 또 어마어마한 질투의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그저 오래된 인연들과 부러울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고만고만한 삶을 살고 있는 내게 글쓰기 멤버들은 오래간만에 휘몰아치는 질투의 한 복판에 나를 세워두었다. 사실 다 내려놓았다고 말했지만 과연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온전히 나를 다 내려놓을 수 있을까 장담하지 못한다. 그저 소박하게 글을 좀 쓰고 싶어요, 안 되면 말고요.라고 말은 했지만 나는 더 잘 쓰고 싶었나보다. 구석에 쳐박혀 혼자만의 글쓰기를 꾸역꾸역 이어가던 나를, 그녀들이 자극했다. A의 묘사도, B의 서사도, C의 구성도, D의 문장도,  E의 능력도,  F의 성품도, G의 재치도, I의 성실함, J의 젊음도 이것도 저것도 모두 다. 어떤 날은 질투에 몸이 달아 오래된 친구에게 중언부언 말했다. 아, 나는 왜 이렇게 사소하고 자잘하고 치사하게 질투하는가. 


 신선하다. 질투에 몸이 달은 나를 보는 게 오랜만이다. 나는 더 이상 휘몰아치는 질투의 한 복판에서 아무 준비도 없이 KO 당하고 싶지 않았다. 질투로 벽을 쌓아 자폭할 것인가, 질투로 무장해서 싸우러 나갈 것인가는 나의 선택이었다. 오늘도 질투로 범벅이 된 채 애써 눈을 질끈 감고 잠들고 싶지는 않다. 이쯤에서 나의 궁극의 질투는 늘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질투한다. 세상의 모든 잘 쓰는 이들을. 네가 감히 그럴 주제가 되냐고 묻지 말기를. 나의 질투는 온전히 나의 것이니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마음껏 질투하고, 웅크렸다, 일어난다. 나의 질투는 오늘도 이렇게 나를 흔들고, 괴롭힌다. 수십 번, 수백 번, 또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질투와 진심이 교차하는 어딘가에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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