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에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왔다.
아이를 키우며 처음으로 13년 만에 밤을 새우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어제저녁 6시부터 다음날 새벽 네시까지. 그저 술 한잔에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다른 이와 얘기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생경한 경험이다.
늦은 저녁에 하는 글쓰기 모임인지라 우리는 수업이 끝나고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총총 들어가기에 바빴다. 글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미루어 짐작하긴 했으나 그 깊이는 어느 정도까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일로 만난 사람은 딱 일만 하면 되는 거였고, 이 나이에 나를 이해하는 친구들은 이미 충분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모험을 할 호기심도 열정도 체력도 없었다. 그저 이 정도면 충분했으니까.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어디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그런 맞춤한 사람을 딱 구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비밀 얘기를 털어놓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 또한 보이는 게 전부인 사람이라 이 긴 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지 못했다. 그저 마음의 빗장이 풀린 열 명의 여성들이 하는 얘기는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남편 욕과 시댁 욕, 부동산과 학원 얘기를 하지 않고도 이렇게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한 사람의 인간에게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니 나는 그저 감탄할 뿐이다. 누구 엄마, 무슨 동네, 어떤 직업, 무슨 대학과 상관없이 이렇게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에 나는 깜짝 놀란다. 열 명의 자매들이여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누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견주어 보지도 않았다. 흔한 질투와 시기의 마음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다른 이의 고통이 나의 여유가 되지도 않았다. 고백하건대 나는 많은 만남에서 다른 이와 나를 견주고 질투와 시기로 자신을 괴롭히기도 했다. 다른 이의 고민을 나의 위안으로 삼기도 했다.
말하는 이가 되기도 하고, 듣는 이가 되기도 했다. 말하고 듣는다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기댈 곳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해답은 자신이 찾아야 할 몫이지만 그저 들어주는 이와 말하는 이가 될 수 있을 때, 우리가 얼마나 인간답게 대접받는 느낌이 들 수 있는지 깨달았다.
그동안은 많은 핑계로 나는 늘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저 딱 내가 할 수 있을 만큼의 고민을 짊어지고, 딱 내가 편할 수 있는 세상에서, 딱 내가 편할 수 있는 사람들과만 행복하게 살았다. 어차피 나는 그만큼의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어제 긴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조금은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꼭 크지는 않아도 조금은 다른 것을 담아볼 수도 있는 그릇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2020년 4월 30일. 나는 진심과 용기, 따뜻한 시선과 허그의 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