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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Jun 02. 2020

식탁 일기 - 오늘의 시간여행

느지막이 잠에서 깨 창밖을 본다. 해가 뜨고도 남은 시간인데 창밖은 아직도 어두컴컴하다. 비가 오는구나. 맑은 날이면 기골이 장대한 모습으로 아침 인사를 하던 북한산 자락이 짙은 안개에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물기를 가득 담은 안개가 사방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잠에서 깨지 않은 채로 멍하니 소파에 앉아서 오늘의 할 일을 체크해본다. 당장 급한 일과 덜 급한 일, 나중에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되짚는다. 날씨 때문인가 오늘은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당장 급한 일도 최대한 미뤄두자.


  며칠 전부터 작은 방 책상 서랍이 자꾸 신경 쓰였다. 급한 일도 아니고 안 해도 될 일이긴 하지만 집안에 굴러다니던 열쇠 꾸러미가 며칠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쓰지 않는 열쇠들을 모아둔 꾸러미였는데, 그 꾸러미에 책상 서랍 열쇠가 달려 있다는 게 생각났다. 언제 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서랍이어서 뭐가 있었는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꼭 필요한 것을 넣어두진 않았고, 옛날 사진 같은 것들을 넣어놨던 서랍이다. 없어져도 일상이 불편해질 것은 하나도 없는 쓸모없는 것들인 건 분명했지만 열쇠 꾸러미가 없으니 확인을 할 수도 없고, 통째로 버리던가, 서랍을 부수던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서랍 속에 뭐가 있었는지 대뜸 궁금해진 것이다.

  하필 아무것도 하기 싫은 오전이라 어제 찾은 열쇠 꾸러미를 들고 가, 작은 방에 있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대학 때부터 쓰던 책상에 달린 세 칸짜리 서랍이었다. 책상은 결혼하면서도 들고 와 한참을 내 작업 테이블로 쓰다가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딸애 책상으로 또 몇 년을 쓰고 있었다. 책상에 달린 서랍도 친정에서 통째로 들고 와 별다른 정리 없이 결혼하고 내내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무슨 이유인지 책상 서랍을 열어 서랍 깊숙한 곳까지 들춰보고 먼지라도 좀 정리해야지 생각한다. 없어졌던 열쇠 꾸러미를 찾기도 했고, 비가 내리는 오전이었으니까.



 열쇠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려 서랍을 열어보니 무슨 타임캡슐이라도 되는 것처럼 20년도 넘는 시간이 서랍 안에 고스란히 봉인되어 있었다. 무턱대고 집어넣고, 열쇠로 잠가 버려서 온갖 사진과 서류, 편지와 메모, 플로피 디스켓들이  아무런 순서도 맥락도 없이 뒤엉켜 있었다.  

 버려야겠다, 고 나는 생각했다. 일단 이제 쓸 수도 없는 플로피 디스켓들을 스무 개쯤 꺼냈다. 처음 일을 하면서 썼던 대본과 구성안, 기획안, 홍보안들이 들어 있던 디스켓이다. 그 당시엔 나의 포트폴리오가 될 만한 중요한 물건이었으나 이젠 이 디스켓들을 열 컴퓨터도 없는 마당에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방송국 일을 그만 둔지도 오 년이 한참 넘어가는 마당에.

 필름과 함께 담긴 서너 뭉치의 사진도 있다. 풍경 사진이거나 젊은 내가 찍혀 있는 사진이다. 다행히 지나간 남자 친구들의 얼굴이 든 사진은 버렸나 보다. 차마 내 얼굴이라 버리지 않은 사진들을 보며, 내가 이렇게 젊었나? 하고 깜짝 놀라, 젊은 얼굴은 다시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서랍에 넣어 두기로 한다.

 다른 칸엔 고등학교 때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써왔던 다이어리가 차곡차곡 포개져 있다. 아, 이게 여기 있었네. 커다란 데이지 꽃이 그려진 손바닥만 한 다이어리를 열었다. 고3 때 내내 들고 다니던 다이어리였다. 첫 장부터 끝 장 까지 깨알 같은 글씨가 살짝 누워 있는 나의 필체가 빼곡하다. 고3 시작, 시험, 성적표, 기도, 대학 같은 단어들이 순차적으로 등장했다. 중간중간 꽂아 둔 메모지와 편지지도 하나하나 펴본다. 우울하고, 짜증 나고, 지겨운 고3 터널을 통과하는 나와 친구들은 편지 내내 고3의 울분을 토하다가, ‘근데 나 있지, 복도에서 00 봤다.’로 편지를 끝내고 있었다. 이제는 얼굴도 흐릿한 그 남자애들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리다 나는 피식하고 웃었다. 세상 절절하던 그 남자애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고3 때의 다이어리를 손에 들고 나는 잠깐 갈등한다. 이걸 버려, 말어? 고3의 다이어리라고 하기에 남자애 이름이 너무 많이 나왔다. 나는 그 남자애랑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다이어리엔 그 남자애 이름이 계속 등장하는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생애주기별로 상대를 옮겨가는 몰입형 짝사랑이 그 애를 향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마흔넷의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이렇게나 절절한 감정으로 그 남자애 이름을 쓰고 있는 열아홉의 나를 보기가 너무나 민망하다. 귀엽다고 생각하고, 우울할 때마다 와서 읽을까?라고 잠깐 생각하다가 갑자기 사고라도 생겨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이 서랍을 연다고 생각하니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아무래도, 버려야겠다.

  남은 다이어리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근차근 읽어보다가 나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란다. 절친 y의 편지다. “ 질투의 화신 같은 년아!(나는 그때도 그랬구나.) 어쨌든 간에 나는 X 랑은 안 맞는 거 같아. 나는 이제 X와 서서히 거리를 두겠어.”라고 쓴 Y. 허허. Y와 X는 지금까지도 끈끈한 절친인데.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니 아 그랬지 너희 들은 처음부터 편한 사이는 아니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이 넘는 시간을 옆에 붙어있다 보니 이렇게 맞지 않는 취향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스며들기도 하는 군,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잠깐, 이 애는 누구지? 

  ‘긍정 에너지녀, 활력의 아이콘, 하면 된다의 선봉자?’  너는 누구냐.

  온 반을 짹짹 거리며 돌아다니며 수다와 여유, 긍정의 에너지로 cheer-up. 을 외치고 다니던 너란 여자. 그게, 나였다.   

  열아홉의 나는 쉬는 시간에도 문제집과 사투를 버리던 A의 손을 잡고 광합성을 하러 교정을 나가고, 실망스러운 성적표를 받아 든 B에게 장문의 격려 편지를 써주었고, 내가 좋아하는 국어 선생님의 책상에 캔커피와 천하장사 소시지를 올려 두고, 남들은 잠잘 시간도 없다던 고3 때, 버스 타지 말고 천호대교를 건너 집으로 가자는 약속을 남발하고 있다. 친구들이 보내온 쪽지 사이사이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의 에너지로 천호동과 광장동, 화양동과 건대입구, 잠실역과 강변역을 누비던 여고생이 나라니. 당장 집 밖을 나갈 열정도 체력도 없어 하루 만보 걷기를 무슨 세기의 과업처럼 달성하는 지금의 나와는 상반되는 여자애. 특유의 쾌활함으로 걱정 한 방울 없이 핑크빛 미래를 설계하던 25년 전의 그 여자애는 시간이 흘러 경기 외곽 신도시 아파트 작은 방에서 그 시절을 추억하는 마흔넷의 여자를 생각이나 해봤을까?

 쪽지와 편지, 다이어리 속의 내용을 보면 분명 내가 맞는데, 이상하게 그 애가 진짜 내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 그때의 나를 떠올려봐도 어쩐지 흐릿하다. 쨍한 유화처럼 붓칠 자국 하나하나까지 기억해보고 싶은데, 오늘 날씨처럼 흐릿하게 묽은 수채화처럼 과거의 색깔들이 번져 어렴풋한 이미지만 기억이 날 뿐이다.

  첫 연애가 끝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난 시간은 다 어디로 가는 거지? 그렇게 맵고, 짜고, 달고, 쓰던 시간들이 연애가 끝나자마자 사방으로 흩어지다니. 이건 말이 안 돼. 왜 과거의 시간들은 다 흔적도 없이 흩어져 손에 잡히지도 않게 사라져 버리는 걸까. 문득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과거의 흔적들을 보고, 나는 물었다. 과거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몇몇 편지를 휴대폰으로 찍어 친구들에게 보내줬다. ‘헉’ 친구들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여기저기 증언이 쏟아졌다.

- 그래, 이딴 쪽지 보내지 말고 그땐 공부를 더 했어야.

- 너의 남자 취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관성이 있군.

- 헉, X에겐 비밀로 해줘.

  카톡 카톡.

각자 또 어디선가 뒤져낸 사진을 첨부 자료로 보내주며 각자의 흑역사를 모두와 함께 공유하며 한참을 웃었다.

 문득, 나는 당시 몰입형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그 애의 안부가 궁금해 쿨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 년 만인가, 육 년 만인가, 그보다 더 오래간만인가. 여하튼 우리는 생사 안부는 물을 수 있는 사이니 차분하게 안부를 묻고, 언젠가 시간이 되면 다 같이 한 번 만나자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조만간 우리가 다시 만날 장소는 늦은 밤 어딘가 장례식장 정도가 제일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생각을 하며.


 아무래도 옛날 다이어리는 버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플로피 디스켓과, 여행지에서 모았던 기차표와 입장권, 지도와 안내책도 함께 비닐봉지에 싹 담아 버렸다.

 세 칸 서랍을 닫고, 먼지를 닦고, 작은 방을 나왔다. 창밖을 보니 어느덧 짙은 안개가 사라졌다. 멀리 북한산이 우뚝하고 서 있었고, 아침에 미뤄둔 일들은 일분일초를 다투며 해결하라! 고 아우성이었다.

잠깐, 하늘이 내려앉은 동안 아득한 시간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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