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 시선으로부터>
좋아하는 젊은 작가 정세랑의 신작입니다.
제목 <시선으로부터>는 누군가의 시선이기도 할 테지만, 주인공 심시선 여사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Q. 성공적인 결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폭력성이거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의 좋은 섹스. 왜요 할머니가 말하니까 웃긴가?
Q. 선생님. 폭력성과 비틀어진 구석이 없다는 건 너무 베이직 아닌가요?
A. 베이직을 갖춘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고 봅니다. 안쪽에 찌그러지고 뾰족한 시선이 있는 사람들, 배우자로든 비즈니스 파트너라도 아무 데도 못 갖다 써요. 꼭 누군가를 해치니까.
Q. 그런데 그런 상대를 어렵게 만나... 섹스를 한다고요? 흥미로운 대화나 서로에 대한 이해 같은 건요?
A. 아이 남편들이랑 무슨 대화를 해요? 그네들은 렌즈가 하나 빠졌어. 세상을 우리처럼 못 봐요. 나를 해칠까 불안하지 않은 상대와 하는 안전한 , 점점 좋아지는 섹스 정도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p20)
<시선으로부터>는 이런 파격적인 대화를 공공연히 공식석상에서 하는 작가이자 여성, 엄마이자 할머니인 심시선 여사의 가족들이 그녀의 기일 10주년을 맞이해 시선 여사가 사진 신부로 간 하와이에서 그녀의 제사를 지내기로 하며 시작된다.
이념 때문에 한국에서 식구들을 전부 잃고, 죽기 살기로 간 하와이에서 우연히 독일의 유명 화가를 만난 심시선은 배움의 열망으로 말도 안 통하는 화가 마티어스를 따라 독일로 간다. 그림을 배우기 위해 간 독일에서 그 시절 동양 여인으로 폭력과 학대를 견디고, 시선 여사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한 축.
또 다른 한 축은 너무 앞선 여성이기에 당시엔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여성인 예술가의 자식과 손주들이 그녀를 회고하며, 할머니보다 한 두 세대를 지나온 여인들의 지금 이야기가 펼쳐진다.
출중한 능력을 가졌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이 아파 자연스럽게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난정, 거래 회사를 향한 화풀이로 여직원들에게 뿌린 염산테러의 피해자 화수, 조그만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의 괴물 컨셉아티스트로서의 능력을 계속 의심당하는 우윤은 심시선 여사에게서 끝나지 않은 한국 여성들의 아픔을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또 한편에는 시선 여사로부터 받은 가르침으로 기세 좋게 자기 삶을 꾸리는 여성들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야기 속 남자들의 캐릭터인데, 딱히 뚜렷한 색깔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어느 멋진 여자 옆에 가져다줘도 그럭저럭 어울릴만한 찌그러지고 뾰족하지 않아 모 난구석이 없는 남자들이 그녀들을 더욱 빛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내내 하와이에서 심시선 여사를 추억하며 특별한 제사를 만들면 전개되는데, 하와이라는 섬이 주는 환상적인 분위기로 자칫 무거운 이야기에 보랏빛 환상이 덧대어 읽힌다. 여성들의 아픔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읽다가 주인공들이 찾아가는 하와이의 명소에서 독자는 잠시 하와이를 추억하거나, 상상하며 환상의 섬 하와이에서 작가가 숨겨 둔 보물을 마주하기도 한다.
“우린 정말 하와이에서 만나 제사를 지내야 해.”라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서 나왔다는 이 소설을 작가는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가라고 말했다.
닮은 듯 닮지 않은 20세기의 여성들과 21세기의 여성들을 생각하며 이 책을 읽었다.
내가 살아온 시간과 내 딸이 살아갈 시간을 짐작하며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가 그저 하와이안 페미니즘 판타지가 아닌 건강한 여자들이 사는 평범한 세상이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