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푸레나무 식탁 Feb 23. 2019

식탁 일기 - 남편 없는 주말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다. 

부모님과 함께 30년이 넘게 살다가 무슨 정신으로 결혼을 결심하고 , 외간 남자와 결혼을 하고, 와본 적도 살아 본 적도 없는 신도시에 신혼살림을 차리기로 했는지 이제와 돌이켜 보면 아찔하기 하다. 하지만 어쨌든 무모한 용기와 자신감으로 시작한 신도시에서의 결혼생활은 가끔 엄청나게 재미없고 사실적인데 지루하기까지 한  독립 단편영화를 보는 것처럼 기억될 때가 있다. 특히, 오늘 같은 이런 주말을 떠올릴 때면.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우리는 젊었고, 둘 다 어마어마한 많은 업무량을 소화해야 하는 위치였으며, 이 결혼 생활에서의 주도권을 상대방에게 절대 빼앗겨서는 안되겠다는 결의와 그 와중에 의무감처럼 신혼의 즐거움도 만끽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갖고 있었다.  어차피 둘 다 바빴지만 나보단 남편이 세 배 정도 더 바빴고, 그나마 집에 들어와서 잠이라도 자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밤샘 업무와 출장, 중간중간 회식과 모임으로 걸핏하면 집에 없었다. 이게 뭐 대단한 일이냐 마는 사실 나는 이때까지  혼자서 텅 빈 집에서 자 본 적이 없었다.  텅 빈 집에 혼자 있었던 경험도 전무한 나에게 남편이 없는 밤은 공포 그 자체였다. 온 집 안의 불을 켜고, 보지도 않는  TV를 켜고 남편이 올 때까지 뜬 눈으로 기다리는 일은 다반사고, 밤샘 작업이 며칠 계속될 거 같다 미리 언질을 주면 아예 짐을 싸서 친정으로 가서 출퇴근을 하기도 했다. 아무도 모르는 외딴 신도시의 복도식 아파트에서 홀로 맞는 밤은 아무리 겪어도 처음인 것처럼 낯설고 무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나마 남편 없는 밤은 겪을만한 것이 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밤이면 늦는다고 타박하는 부모님과 사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과 밤새 즐겁게 보내고 좀 취해서 들어가면 밤이 그렇게 무섭지 않을 때도 있었고 그도 내키지 않으면 친정으로 가면 되는 거였으니까.

진짜 무서운 것은 그다음부터였던 것이다. 딸이 태어났다. 딸이 태어나고 맞는 남편 없는 밤은 그야말로 극강의 공포였다. 남편은 여전히 바빴고, 낮에도 밤에도 없었고, 우리 딸은 세상 없는 예민한 아이 었으니 딸은 낮이고 밤이고 안고 있어야 잠을 잤고, 잠깐이라도 내려놓으면 온 동네가 떠나가라 울어댔으니 나는 밤마다 맨 정신으로 일어나 수유를 하고 애를 안고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홀로 긴긴밤을 보내야 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지금 그 힘든 육아의 기간과 산후우울증을 말하고 싶진 않다. 지금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쨌든 남편은 그 후로도 계속 바빴고 육아는 혼자의 몫이었으며, 따님이 그나마 밤에 잠 좀 자나보다 하고 마음을 놓은 것은 그녀가 만 네 살이 넘어가서야 겨우 찾아온 것이었으며 신혼 생활이 끝나고 나는 아이와 함께 남편=아빠 없이 지내는 법을 터득한 지 이제 12년 차에 들어선다는 게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말이다.  


남편=아빠 없는 평일은 사실 참을만한 것인데 남편=아빠 없는 주말은 사실 밑도 끝도 없는 상실감을 느끼기 알맞은 시간이다. 진짜로 남편=아빠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남들이 다 가족과 함께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그 시간에 우리는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 점심 간식까지 다 챙겨 먹고 동네 놀이터까지 다녀오고 목욕도 하고 집에 있는 장난감을 다 가지고 놀아봐도 아직도 저녁이 되지 않는 이상한 시간. 그렇다고 남편=아빠가 있다고 이 시간이 되게 즐겁고 활기찬 것이 아니란 사실은 자명한데, 아니 오히려 남편=아빠가 있으면 주말의 어느 시간쯤 이미 상대방의 참을 수 없는 모습을 참을 데 까지 참다가 이상한 데서 급 짜증이 튀어나와 결국은 상대방에 대한 화풀이로 끝난다는 것도 사실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상실감에 빨리 밤이 오고 남편 없는 주말이 빨리 끝나길 바라던 시간도 있었다.


그렇게 남편 없는 평일, 주말, 밤을 보내기 12년 차.

남편은 요즘 스케줄상 불금, 불토를 회사에서 보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 수많은 불금과 불토를 나를 독박 육아하게 만들고 일요일 아침에 들어와 내내 잠만 자다가 주는 밥을 먹고 또 자는 남편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참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도 이제 면역력이란 게 길러졌는지 진짜 어른이 된 것인지 사실 남편 없이 자는 밤도 이제 무섭지 않고, 남편 없는 주말이 다른 날과 별다르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남편이 서운할지도 모르겠으나 그 사이 우리 젖먹이 딸내미가 12살이 되었고 , 딸내미와 나는 12년 동안 지지고 볶은 친구가 되어 서로 평화롭게 하루를 보내는 법도 터득하게 된 듯도 하다.

 

겨울 기운이 물러가고 정말 봄날 같았던 오늘, 가족과 함께 어디라도 다녀왔으면 좋겠다 싶은 날씨였지만 오늘 우리가 한 일은 이렇다.

아침 8시 일어나서 오전에 다음 주 발레 발표회 연습 가는 딸 아침 준비, 함께 아침 먹고, 발레 학원까지 데려다준 후, 점심은 카레가 당긴다는 말에 집 앞 마트에서 카레와 딸기도 좀 사고, 혹시라도 저녁에 적적해지면 혼자 마실 와인도 한 병 사고, 딸이 오기 전까지 다음 주 수업할 내용 준비를 하고,  ‘다녀왔습니다’ 하고 딸이 오면 따끈하게 먹을 수 있게 카레를 만들고, 얼른 먹고, 오늘 개학하는 성당 주일학교 보내고, 딸이 돌아오기 전 두 시간 동안 막간에 청소하고, 빨래도 돌린다. 오후 네 시쯤 돌아온 딸과 함께 간식을 핑계로 오레오 한 봉지와 라면땅 한 봉지를 뜯어 커피와 사과주스를 갈아서 낄낄 거리며 먹고, 저녁 준비하기까지  자유시간. 나는 마침 시작한 소설이 괜찮을 것 같았고, 딸은 엄마와는 음악 취향이 맞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어폰을 꽂고 이거 저거 펴 놓고 읽다가 누웠다가 같이 떠들다 보니 어느덧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 되었다.

사실 딸이 없던 시절 혼자 보내는 주말은 거의 침대에 붙어서 주말에도 쉬지 않는 남편을 탓하기만 해도 모자란 시간이었는데,  혼자 남편 원망하다 기분도 좋지 않아져서 입맛도 잃고, 지금처럼 삼시 세 끼는커녕 냉장고엔 그날 한 끼 먹을 식량도 없어서 배를 쫄쫄 굶어가며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오늘 딸과 함께 나란히 소파에 누워 발로 간지럼을 태우다 목소리도 커지고 깔깔 웃다가 배도 고프고 해서 오레오 한 봉지와 라면땅 한 봉지를 뜯으며 느끼는 이상한 충만감에 오늘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물론 내 몸이 눕고 싶을 때 밥을 하고, 말하기 싫을 때도 대답을 하고, 성장기 딸은 하루 세 끼는 물론 중간중간 간식도 계속 먹고 싶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혼자일 때 보다 세 배 네 배는 더 움직여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보낸 그때 그 주말과 딸과 보내는 지금 이 주말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딸과 보내는 지금 이 주말을 선택하고 싶다.

엄마는 이제 기초대사량도 떨어져서 저녁은 이제 좀 안 먹었으면 좋겠지만 저녁은 오랜만에 떡볶이가 먹고 싶다는 주문에 ‘그럼 우리 맵게 먹어볼까?’ 하고 꼬셔봐도 매운 것은 절대 못 먹는 딸 덕에 맛난 떡볶이를 간장 양념으로 한 솥을 끓이고,  나는 페퍼로치노나 뿌려서 먹고 있긴 하지만 주말이니 엄마는 와인 한 잔 하겠다는 말에 주스를 꺼내와 짠 해주는 딸과 함께 보내는 남편 없는 주말은 사실 남편은 모르는 반짝이는 순간이 있다.

이제  저녁도 다 먹고, 설거지도 끝내고 엄마는 이제 창작활동을 할 테니 너는 네 할 일을 하거라 하니 제 방으로 가서 하기 싫은 숙제와 듣고 싶은 아이돌 노래를 마주하고  책상 앞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네 모습도 그렇고, 그 소중한 시간에 이제 나는 저녁에 먹다 남은 와인을 따라두고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먼 훗날 딸애는 커서 젊은이에 어울릴 그럴듯한 주말을 보내고, 남편의 바쁜 일들도 이제 한풀 꺾여 나와 함께 주말 식탁에 앉는다면 오늘 열두 살의 딸과 함께 보낸 주말을 잊지 말아야지.

 

아, 이 평화로운 주말은 지난 12년간 지나온 외로운 주말에 대한 보상인가, 하고 감상적인 기분이 들려고 하는 이때, “엄마 초바 먹고 싶어! (초코와 바나나를 우유에 갈아달라!)"를 외치는 딸과 함께 하는 2019년 2월 23일 토요일 밤 9시.

작가의 이전글 식탁 일기 - 소희 언니와 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