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에서 운을 다 썼어요"

한국사 수업에서 만난 한 아이의 마음

by 문작

오랜 친구의 아들에게 한국사 수업을 해주고 있다.

친구는 아들이 5학년인데 한국사를 어려워하고, 책도 잘 읽지 않는다며 걱정을 털어놨다. 장난기가 많아 수업 태도도 염려된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나도 덩달아 긴장이 됐다. 게다가 멀리 떨어져 있어 온라인으로 수업을 해야 하니, 마음만 먹으면 딴짓하기 십상이 아닌가.


그런데 막상 수업을 시작해 보니, 아이의 모습은 엄마의 우려와는 달랐다.

"한국사는 어렵고 잘 모르겠어요." 하면서도 막상 대화를 나누면 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학교 수업과 TV 프로그램, 가족과의 여행에서 얻은 배경지식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정확한 용어나 개념이 헷갈릴 뿐이었다.


덕분에 수업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아이가 조금씩 한국사에 흥미를 갖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나중에 친구에게 들려줄 피드백을 생각하며, 아이가 수업 중에 한 인상적인 말을 기억해두곤 했다. 호기심도 많고 생각도 깊은 아이였다.


며칠 뒤, 수업 일정을 상의하려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아이가 한 말이 생각났다.

"친구야, 수업 시간에 00이가 한 말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어서 꼭 말해주려고 한 게 있었어."

"정말? 어떤 말인데?"


친구의 목소리는 기대와 걱정이 섞여 있었다. 얼마 전 수학 선생님에게 '숙제를 대충 하고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혹시 나도 비슷한 말을 하려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워했다. 하지만 내가 하려던 이야기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얼마 전 조선시대 신분제를 배웠거든. 그래서 내가 '00이는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양반, 상민, 천민 중 어떤 신분이었을 것 같아?'라고 물었지. 그랬더니 자기는 '노비일 것 같다'라고 하더라고.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어. '저는 엄마 아빠 덕분에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어서요. 제가 누릴 수 있는 운은 이번 생에서 다 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조선 시대에 태어난다면 노비일지도 몰라요."


"정말? 우리 애가 그런 말을 했다고?"


전화기 너머 친구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감동과 미안함에 울컥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부모는 자식을 다 아는 것 같아도 정작 가장 중요한 마음은 놓치고 살 때가 많은 듯하다. 아이의 한 마디는 어른인 우리에게 더 큰 울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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