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당신의 가치는 어디 있나요?
있잖아요,
“근데 왜 왔어요?”
오늘 진짜 솔직한 이야기를 할 거예요. 진짜 솔직하고 하기 힘든 이야기.
“네?”
내가 입사하고 처음에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이에요.
근데 왜 왔냐고. 왜 이곳으로 왔냐고.
그때마다 깜짝 놀랐죠. 왜 왔냐니요.
얼마나 좋은 회사인데. 남들은 못 들어와서 안달인 회사인데. 소수에게만 허락된 회사인데.
“근데 왜 여기로 왔어요?”
대한민국 기업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회사.
그중에서 가장 경쟁률이 치열하다는 계열사.
근데 지금 왜 왔냐고 물으신다면.
“네?”
저 또한 굉장히 자랑스러운 업적이었고,
가족들도, 친구들도, 교수님들도, 선후배들도 다 잘 갔다고 축하해줬는데.
정말 그전 몇 년과 그 후 몇 년을 비교해봐도 제일 잘 풀린 케이스 중 하나였는데.
근데 도착하니까 왜 왔냐고 묻는 거예요. 좋은 학교를 나와서 왜 여기를 왔냐고.
처음에는 정말 이상했죠.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기업을 다니면서 왜 그렇게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거지? 이해도 잘 안 갔고요.
회사 내에서 다른 분들이 물어보실 때도 놀랐고,
출장 가서 다른 계열사지만 그래도 같은 그룹 아래 있는 광고주분들이 물어보실 때도 놀랐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기업에 입사했는데 왜 왔냐니요. 말이 안 되잖아요.
저는 이 질문이, 이 태도가 되게 부정적으로 작용했어요.
무슨 말이냐면, 오늘 솔직하고 하기 힘든 이야기할 거라고 했잖아요.
제 가장 뿌리 깊은 약점 중 하나를 들춰낼 건데, 그게 바로
자만이거든요.
처음에는 되게 감사했고, 정말 감사했어요.
물론 눈물 나게 열심히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니까,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자리니까
정말 감사했어요.
근데 계속해서 그런 말들을 들으니까 나도 모르게 다른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던 거 같아요.
나의 잘남에 대한 어떠한 것이.
내가 잘나서 좋은 학교에 들어갔고,
내가 잘나서 좋은 성적을 받았으며,
내가 잘나서 조기 졸업을 이루었는데,
내가 잘나서 조기 취업까지 해내었다고.
그 회사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기업이라고.
그 생각이 나도 모르게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던 거 같아요.
근데 그걸 어떻게 깨달았냐면 그 당시에 어떠한 태도의 차이가 있었던 게 아니라
퇴사하고 나서 그러한 마음 때문에 계속 괴로웠거든요.
차라리 회사에 다닐 때는 자만이 경계해야 할 적이라고 생각된 적이 없었는데,
퇴사하고 나니까 치밀하고 교묘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시기가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나 자신을 입증하고 인정받고 싶은 경향을 도드라지게 자극하는 방식으로.
회사에 다닐 때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하든 말든 별로 신경이 안 쓰였어요.
근데 퇴사를 하고 홀가분하던 시절이 한차례 지나가고 나서
두드려도 열리는 문은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앞이 캄캄하고 막막하니까
그러니까 지금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굉장히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누구를 만나서 이름을 말하고, 나이를 말한 후 그 사람이 내게 뭘 하냐고 물어보면
“아, 지금은 쉬고 있어요”
이 말이 나를 점점 무너뜨리더라고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거 같아서.
이제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아서.
그때부터 자만이 교묘하게 파고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자꾸 나 자신을 입증하고 싶어지더라고요.
나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근데 지금 잠깐 이 휴식의 시기가 길어지는 것뿐이야, 그렇게.
그렇게 입증하려면 나는 과거에 나를 끊임없이 부각해야 하고 고로 나는
내가 잘나서 좋은 학교에 들어갔고,
내가 잘나서 좋은 성적을 받았으며,
내가 잘나서 조기 졸업을 이루었는데,
내가 잘나서 조기 취업까지 해내었다고.
그 회사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기업이라고.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그렇게 자꾸 나 자신에게 주입시키고 있더라고요.
나 자신을 입증하고 싶으니까. 다시 인정받고 싶으니까.
“지금은 쉬고 있어요” 이 말이 싫으니까.
이 말을 하면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싫으니까.
내 안에 자존감이 굉장히 낮아지다 보니까
다시 자신감을 갖자는 게 그만 역으로 자꾸 자만심만 키운 거예요.
그래 나 그런 사람이라고.
나 그런 사람이었다고.
긍정적인 자신감 키우기였다면 좋았겠지만,
허풍 된 자만함만 키워버렸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나 그런 사람이야라고 잔뜩 생각하고 돌아서면
지금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내가 보였으니까요.
그래서 뭐하냐는 질문에 나는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니고
여전히 “지금은 쉬고 있어요”라는 똑같은 대답만 되풀이했으니까요.
내 힘으로 한 게 하나 없으면서 자꾸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그 모든 것들을 끄집어낸 후부터
그때와 비교해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지금이 더 뾰족하게 드러났으니까요, 내 안에는.
“근데 희원아.”
그러다 그런 생각을 들게 하시는 거예요.
이 상태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자꾸 헛된 가치와 잘못된 태도만 잡고 있던 내가,
놓지 않으려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온 힘을 다해 붙잡고 있던 내가,
지금 아무것도 없는 이 상태가 괴로워 과거에 모든 걸 갖고 있던 상태를 끊임없이 재생하는 내가
더는 보기가 안쓰러우셨는지
손에 피가 나도록 껍데기만 쥐고 주저앉아 있는 내게 찾아오셔서.
“그거 다 내가 네게 준거란다.
그거 다 내가 너에게 준거야.”
점점 커지던 자만함을 날카롭게 들춰내시고 찌르시는 게 아니라
끝까지 남은 자존심을 놓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는 내게 다가와
조용히 타이르듯, 부드럽게 달래듯.
“희원아,
그거 다 내가 너에게 준거란다.”
맞아요.
내 힘으로, 내 지혜로, 내 뛰어남으로 한 거 하나 없는데.
내가 얼마나 못나고 부족한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그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할 때 부어주신 은혜라는 걸 내가 제일 잘 아는데.
근데 그렇게 안간힘을 쓰며 내가 잘났다고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던 내게,
당신의 돕는 손길을 거둬가셔도 아무런 할 말이 없었을 내게,
더는 되돌아오지 못할 상태에 이르기 전에 다시 한 번.
“근데 희원아,
그보다 더 네가 꼭 알아야 할 게 무엇인지 아니?”
“뭔데요?”
“나에게는 네가
너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금도
똑같은 너란다.”
아…
“나에게는 네가
세상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힘과 권력, 명예와 부를 다 떼고 있는 지금도
나한테는 네가 똑같이 귀하단다.
아니.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나와 교제하는 지금의 네가
나에게는 가장 귀하단다.”
아…
“나는 네가
그 모든 걸 누리고 있을 때나
아무것도 누리고 있지 않을 때나
뭐가 더 가치 있고, 뭐가 더 좋은 것이 아니라
잘 나갈 때는 옆에 두고, 못 나갈 때는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너는
똑같이 귀한 존재이자 사랑이라는 걸.”
아…
그런 건가요.
나라는 사람이 당신에게.
나라는 존재가 당신에게.
내가
당신에게.
“이 휴식 또한 내가 네게 주는 선물이란다.
네가 내 안에서 단련된 후
너에게 나의 일을 맡기기 위해
높은 유리 건물 안에 높은 연봉을 받을 때보다
지금 이 순간 네가 훨씬 중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기대했던 대학으로부터 불합격 통보를 받은 후
갈 바를 알지 못해 멍하니 서 있던 내게
전화를 걸어 죄송하다는 말밖에 더는 하지 못하던 내게
“희원아,
할아버지는 우리 희원이가 제일 똑똑하고 자랑스러워.
할아버지한테는 우리 손녀가 제일 멋지단다.
희원이 사랑한다. 할아버지가 사랑해.”
아.
나는 서랍 안 깊숙이 숨겨버린 합격통지서를
당신은 꺼내 가슴에 소중히 품고
나는 자존심이 상해 고개를 숙이고 다니던 그때
당신은 친구들에게 꺼내 보여주시며
나는 보잘것없다고 이미 나 자신을 상처 내고 찌른 후
당신은 그 모습을 가장 자랑스럽다고, 너무 대견하다고
나는 무너진 채로 호흡조차 하기 괴로워 외면하던 나 자신을
당신은 사랑한다고, 너무 사랑한다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딸이라고.
나는 왜 자꾸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걸까요.
나는 왜 자꾸
나 자신의 가치를 헛되고 헛된 곳에서 찾고 있었던 걸까요.
나는 왜 자꾸
그게 뭐라고 그렇게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모래를
바들바들 떨면서도 여전히
붙들려고 안간힘을 썼던 걸까요.
“나에게는 네가
너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금의 네가
그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그 여느 때와 변함없이,
가장 귀하단다.”
고맙습니다.
사람들은 나의 나이, 학벌, 직업, 연봉을
물어보고 따지고, 점수 매기고 미래를 계산하고,
내 껍데기를 보고 판단하고, 내 이력서를 보고 평가하고,
자꾸 나를 숫자와 알파벳으로 환산하려 할 때
당신은
그때의 내 모습이나
지금의 내 모습이나
한결같이
변함없이
나를 믿어주고
나를 기다려주고
나를 아름답다 하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어서
나를 있는 그대로
아껴주어서.
당신은 나를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해주어서.
있잖아요, 그 다섯 번째
5. 당신의 가치는 어디 있나요?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