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있잖아요

있잖아요, 그 열한 번째

11. 받고 싶은 선물이 있으신가요?

by 일요일은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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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요,


그런 적 있지 않아요?

무언갈 하고 있거나, 쉬고 있거나, 생각에 잠겨있거나, 혹은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는데

갑자기 이전의 어떤 기억이 머리를 휙 하고 스쳐 갈 때요.

별다른 이유 없이, 어떻게 보면 조금 뜬금없어 보이기도 한데 잊고 있던 예전의 조각 하나가 떠오를 때요.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도 가끔 그렇게 묻어두었던 장면이 생각날 때가 있어요.

어제가 그런 날이었어요.


하루를 보내고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아주 오래전 기억이 하나 떠오르는 거예요.

그 기억 속에는 3학년 즈음이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고,

무언갈 곰곰이 생각하고 있길래 무얼 하고 있나 하고 보니

아빠 생일선물로 무얼 준비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더라고요.

엄마 선물은 아이디어도 많고 매년 조금이라도 색다른 걸 준비할 수 있었는데

아빠 선물은 늘 너무 어려웠었죠. 초등학생이던 그 당시에는 더.

당시에도 선물에 관한 철학은 그 사람이 필요한 걸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기에 며칠 아빠를 관찰하다

드디어 무얼 사면 좋을지 선물이 생각났나 봐요.

아이스크림을 사러 갈 때마다 본 적이 있는 게 기억나 서랍에서 모아둔 용돈을 꺼내

아파트 단지에 있던 슈퍼로 달려가더군요.

그러고는 문을 열고 뒤까지 달려가 아이스크림 맞은편 진열대에 있던 물건을 집었는데,

그건 바로 면도크림이었어요.

매일 출근 전 아침에 세수하시면서 무언갈 바르고 면도하시던 모습이 또렷이도 남았는지

이걸 사면 아빠가 매일 쓸 수 있겠구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없겠구나 하고

집에 돌아와서 화장실 세면대에 있는 통과 똑같은 건지 나란히 대보고 다시 확인하고는

포장지를 모아 둔 상자를 꺼내 삐뚤빼뚤해도 열심히 직사각형 모양으로 자르고, 테이프를 붙이고.

문방구 언니가 각을 맞춰 포장해주던 것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지만

초등학생의 최선을 다해 예쁘게 포장을 한 선물과 카드를 다 같이 케이크 위 촛불을 끈 후 전해드렸다죠.

그렇게 매년 반복했던 거 같아요.

똑같은 면도크림이었지만 늘 마음을 다해.


피식 웃음이 났어요.

오히려 엄마 생일선물은 아이디어도 더 많고 고르기도 쉬워 매년 무언가 다른 걸 준비했기 때문에

별다른 기억이 없는데

아빠 생일만큼은 늘 한결같이 초록색 뚜껑과 까만색 몸통의 면도크림이었기 때문에 기억이 나더라고요.

쓰시던 걸 다 쓰고 나서 선물해드린 새로운 통을 사용하실 때 얼마나 뿌듯했는지.

내가 직접 고른 선물을 매일 쓰시던 모습이 당시 내 기준으로는 아주 성공적으로 선물을 고른 거였어요.

정말 옛날이에요. 맞아요, 그랬던 때가 있었죠.


한 학년씩 올라가며 사춘기가 오고, 가족과 점점 멀어지고.

그 유명한 문 쾅 닫기도 여러 번 했고, 아파트 놀이터에 저녁 내내 앉아있기도 했고.

이런저런 생각의 변화도 오고, 시각의 변화도, 가치관의 변화 또한 왔죠.

그 사람이 필요한 선물을 줘야 한다는 실용주의적인 생각은 그만 너무 실용적이 되어버려서

해마다 오는 생일을 유난스럽게 챙길 필요 없다는 생각으로 변해버렸어요.

자연스럽게 매년 무얼 선물할까 고민하던 과정도 (결국, 같은 면도크림으로 결정을 내려도),

신나게 슈퍼로 껑충껑충 뛰어가던 걸음과 포장지를 꺼내 이렇게 저렇게 둘러보던 시간도,

그 모든 것이 다 함께 사라져 버렸죠.

학생일 때는 공부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기숙사에 들어가서는 멀리 있다는 핑계로

언제부터였을까요, 중학생? 고등학생?

언젠가부터는 간단한 축하 외에 더 챙기지 않았어요. 생일은 어차피 내년에 또 온다는 합리화와 함께.


오히려 친구들의 생일은 꼭 챙기고, 선생님의 생일조차 그냥 넘어간 적이 없는데

정작 가장 소중한 가족의 생일은 대충 넘기기 시작했죠. 그래도 된다는 변명과 함께.

그러고 보니 신난 모습으로 뛰어가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처음에는 따뜻하게 다가왔는데

해가 지나면서 그 모습이 점차 사라져 버린 기억이 떠오르더니 목이 턱 하고 막히더라고요.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왜 그랬을까…


참, 사람 마음이 뭔지. 소중할수록 소중하지 않게 대할 때가 많은 거 같아요.

오히려 적당히 소중하면 조심히 다루려고 하는데,

정말 소중한 것들은 늘 그곳에 있을 거란 생각과 변함없을 거란 생각 때문에 돌아보지 않을 때가 많죠.

늘 나를 위하고, 늘 나를 믿어주고, 늘 나를 기다려줄 거란 생각에,

매일 물을 주지 않아도 그 자리를 지키는 선인장 같은 존재이니까.

그런 어리석음 때문에 정말 소중한 걸 놓치고는 하잖아요. 또 한 분 계시죠? 그런 존재.


성탄 주일에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12월이 다 돼서, 성탄 주일이 돼서 예수님의 생일을 맞아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기보다는

한해의 시작부터 준비해 한해의 끝이 되었을 때 일 년간 정성과 노력이 들어간 선물을 드리자고.

그 어떤 선물보다 우리의 마음, 시간, 관심, 사랑, 그리고 우리 자신, 내 모습 이대로 원하실 그분께

한 해 동안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르며, 그분과의 동행을 누리며

봄부터 겨울까지 그분과 함께 걷는다면, 그러기 위해 노력한다면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실 선물이자 우리 또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이 될 것이라는 걸.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요한계시록 2:4


다른데 흠잡을 거 없이 건강했던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잃었기에 책망받았던 것처럼

세월과 함께 우리 또한 첫사랑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르지 않고, 동행을 누리지 못하고

바쁘게 내 삶을 살아내기만 하지는 않았는지, 사랑을 잃지는 않았는지.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2:5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지금 아직 2017년이 열두 달이나 남았지만

늘 그랬듯 또 한 번 금방 찾아올 올해의 끝을 생각해보며

가장 귀한 선물을 준비하려고요.


바로 이곳,

나의 삶 속에서.


있잖아요, 그 열한 번째

11. 받고 싶은 선물이 있으신가요?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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