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이처럼 애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셨다
…각각 상황은 다르지만 예수님은 매번 똑같이 연민 (compassion;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으로 반응하셨다. 연민을 풀이하자면 마음이 간다는 정도의 뜻이지만, 이에 해당하는 1세기의 표현은 훨씬 더 시각적이었다.
“불쌍히”로 번역한 단어는, 내가 신약에서 매우 좋아하는 헬라어 단어 가운데 하나다. 이 단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로, 창자가 움직인다는 뜻이다. 짐짓 역겨울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창자를 감정의 중심으로 보았다. 그래서 ‘안됐네요’ 혹은 ‘마음이 아프네요’라는 뜻으로, 그들은 연민으로 인해 창자가 움직인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어려움 앞에서 애가 끊어질 정도로 마음 아파하셨다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복부를 세게 맞은 것 같은 고통이었다. 당신도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길에서 어떤 사람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던 적이 있는가? 속이 답답하게 만드는 논쟁을 본 적이 있는가?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보고 그들의 아픔을 같이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엄청난 뭔가에 자신도 모르게 폐부 깊은 곳에서 반응이 일어날 때가 있다.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에 우리 안의 뭔가가 움직인다. 바로 이것이 스플랑크니조마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 우리 밖으로 폭발할 만큼 강력한 연민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이처럼 애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셨다. 하지만 단순히 연민을 ‘느끼는’ 데는 그릿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 연민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보통 힘든 선택이 아니다.
제이슨 미첼, “쉬운 예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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