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나의 세상에
새기고 싶었던 것들에 대하여

-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10]

by 일요일은 쉽니다


당신이 나의 세상에 새기고 싶었던 것들에 대하여

-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그 후로도 나는 방학이 되면 계절에 맞춰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 살 더 먹고 한 학년씩 올라가도 인생의 흐름은 큰 틀 안에 유지돼서 키가 몇 센티 더 큰 것 말고는 아침이 가고 밤이 오듯, 또 밤이 가고 아침이 오듯 많은 것이 정해진 규칙 하에 움직였다. 하지만 더운 날씨와 추운 날씨를 번갈아가며 계절은 다시 돌아왔다 한들 모든 것이 유지되지는 않았다. 단적인 예로 그 여름방학 이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십 년이란 세월 동안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공항으로 나오시던 마중을 더는 하지 못하셨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미묘한 변화들은 이미 자리 잡은 후였다.


이전에는 할아버지와 지하철을 타면 아무리 괜찮다 해도 꼭 나를 앉히시고는 본인은 그 앞에 서서 가셨다. 근데 그해 방학부터는 괜찮으니 할아버지 앉으시라는 말씀에 거절하지 못한 채 앉아서 가셨다.


이전에는 일주일에 몇 번 동네 시장에 과일을 사러 갈 때면 아무리 나눠 들자고 해도 할아버지 혼자서 과일이 든 봉지를 다 들고 가셨다. 근데 그해 방학부터는 내가 과일이 든 봉지를 건네받으면 무거운데 미안하다며 내 손에 나눠주셨다.


그러고 방학이 끝날 즈음 학교로 돌아가기 전, 떠나기 전날 저녁이 되면 배웅하러 못 가서 미안하다며, 할아버지가 아파서 맛있는 걸 많이 못 사줘서 미안하다며,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챙기느라 맛있는 반찬도 많이 못 해줘서 미안하다며 전화를 하셨다.


그렇게 미안하다는 인사가 모든 끝에 따라붙기 시작했다. 미안하지 않아도 될 일이 미안해지는, 충분히 잘해주셨는데도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마음이었다. 자식이 아무리 괜찮다 해도, 아무리 충분하다 해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한 것이 부모의 마음인듯했다. 그러면 그때마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아서 전화를 끊고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틀어놓고도 들릴까 숨죽여 울었다. 그러고는 눈물이 아닌 척을 하기 위해 차가운 물을 얼굴에 마구 끼얹었다. 그 마음 가운데에는 어떠한 모순이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다. 자식은 받은 사랑을 돌려드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일이 없는데, 부모는 왜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것일까. 그런 자괴감이 내 키를 훌쩍 넘은 파도처럼 덮쳐 올 때면 그날 하루를 견디기가 버거웠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병원에서 흉선암 말기라는 판정이 떨어진 후 희귀암이고 너무 늦게 발견해 손쓸 도리가 없다며 6개월, 길어봤자 일 년이라는 기간을 선고한 후에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 말기암이 나았다는 사례는 다 찾아보았고 그렇게 찾아가시기 시작한 한의원에서 할아버지는 기적처럼 가슴 정중앙에 자리 잡은 혹이 더는 커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효과를 보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천천히 다시 활력을 찾으셨다. 아침이 밝아오기 전 일어나서 준비하시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오시면 점심으로 접어들 때 즈음이었고, 그러면 와서 식사하시고 이전과 같이 컴퓨터로 일을 하셨다. 골프채를 더는 집지는 못하셨지만 병원에서 예측했던 6개월을 넘긴 후에도 이전과 같이 움직이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병원에서 말한 6개월은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하기도 전에 끝날 기한이었지만, 할아버지는 내가 대학입시를 준비하며 고등학교의 마지막 때를 보낼 때까지 여전히 우리 곁에 계셨다.


고등학교의 마지막 해, 대입이란 벽 앞에서 한차례 무너졌다. 갈망했던 대학들이 있었고 목표했던 학교들이 있었지만 미리 가늠할 수 없었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저 벽을 넘으리라 다짐했는데, 그래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리라 다짐했는데, 지난 십몇 년간의 교육의 길 위에서 직진만 하다가 갑자기 타이어에 펑크가 난 기분이었다.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뛰어넘으려던 장애물이 갑자기 발목을 움켜쥐더니 바다 깊숙이 가라앉을 무게로 변해 어둠 속으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죄책감. 자괴감. 허무함. 그런 것들이 나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실패했다 동의했기 때문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저 파도에 끌려갈 뿐. 점점 육지에서 멀어지는 걸 알면서도 한번 거슬러 헤엄치지 못한 채 그대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회오리바람의 속도와 기운으로 휘감는 건 순식간이었고, 한동안 너무 멍해서 그 늪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서윤아.”


수업이 끝난 오후 집으로 돌아오면 일주일에 두세 번 외갓집에 안부 전화를 드렸다. 이미 엄마를 통해 소식을 다 들으신 후였지만, 그래도 내 입으로는 처음 말씀드리게 된 날이었다. 먼저 받으신 할머니가 아무렇지 않은 듯 기죽지 말라고 애써 위로해주시고 끊기 전 갑자기 할아버지가 바꿔달라 하신다며 전화를 넘겨주셨다.


“죄송합니다…”


따뜻한 목소리에 그만 흔들리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그 말만은 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랐는데, 실망하게 해드리는 일만큼은 없기를 바랐는데, 삶이 나의 노력과는 반대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전화를 바꿔 달라는 할아버지께 내가 건넬 수 있는 말은 아무리 찾아봐도 죄송하다는 것밖에는 없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죄송함. 아니, 기대보다 못 미친 죄송함. 자랑스러운 손녀가 되어드리지 못한 죄송함. 애초에 죄송할 일을 만들지 않았으면 되는데 만들어 버려서 죄송함. 죄송해서 죄송함.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죄송한 것뿐이었다. 나의 많은 것들이 불안하게 흔들리던 나날들이었다.


“할아버지한테는 우리 서윤이가 제일 자랑스러워.”


위로조차 받을 자격이 있을까 고민하던 내게 먼저 다가와 건네주신 말씀이었다. 이미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은 마치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거세졌다. 아무리 수화기를 손으로 덮고 애써 눈물을 삼켜도 그 울림이 전해졌는지 상대편에서도 비슷한 눈물이 되돌아왔다.


“할아버지가 우리 서윤이 사랑해.”


입술을 깨물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춰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왜, 내가 뭐라고 자랑스럽다 하신 걸까. 그 어느 때보다 자식을 명함같이 꺼내 들며 살아가는 시대에 나는 그 첫 줄을 화려한 이름으로 채우지 못했는데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자랑스럽다 하신 걸까. 어깨를 펴 드리지 못한 채 나 홀로 동굴에 숨어버렸는데 내가 뭐라고, 도대체 내가 뭐라고…


“할아버지가 많이 사랑한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한 무엇이, 내가 가진 무엇이, 내가 이룬 무엇이, 내가 도달한 무엇이 자랑스러우신 게 아니라는 것을. 물론, 그것들도 소중한 열매의 결실이지만 할아버지는 그 자체보다 그저 내가 자랑스러우시다는 걸. 그래서 알록달록 꽃을 피운 나무도 아름답지만, 초록 잎사귀만 품어낸 나무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는 걸.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또 내가 무엇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나는 나이기 때문에

아무런 형용사 없이 그저 내 이름 석 자가 당신의 가슴에 큰 자랑이라는 걸.


할아버지는 아끼지 않으셨다. 전화조차 하기가 죄송스러워 며칠 미루다 겨우 번호를 눌렀을 때, 할아버지는 당신의 진심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중의 기회를 기다리지 않고 그 순간을 잡으셨다. 비를 그대로 맞으며 우산을 쥘 힘 없이 무너져 있는 나에게 다가오셔서 감기 걸리면 안 된다고 본인의 두 팔로 우산이 되어주셨다. 본인은 비에 쫄딱 젖으면서도 나부터 챙기셨다, 그 변함없는 사랑으로 인해.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서서히 어둡고 무섭던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그렇게 많은 것이 끝일 줄 알았다. 그러나 끝까지 나를 놓지 않은 힘에 이끌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몸은 사랑이라는 거대한 중력으로 인해 모래사장 위에 튕겨 있었고 가쁜 숨이라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대로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제대로 도전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해보기 위하여.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그러할 수 있었음에는 내가 누구든, 내가 어떻든

나는 그저 나이기 때문에 자랑스러우시다는, 나이기 때문에 사랑하신다는 당신이 있었기에.


그런 당신이 있어

많은 게 다시 가능해졌다.

많은 걸 다시 꿈꿀 수 있었다.


그런 당신이 있어,

그런 당신이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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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의 세상에 새기고 싶었던 것들에 대하여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