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숲으로
커튼 사이로 미세하게 들어오던 햇살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루가 끝나가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른 아침의 움직임을 좋아하는 나지만 그날은 좀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다,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하루를 마음껏 낭비하고 싶었다. 바로 전날, 가깝고도 멀어야 하는 상대로부터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상대의 말실수가 빈번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윗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쏟아져 나오는 야유와 비난을 피할 방법을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쌓이고 쌓였던 만큼 한번 마주할 때마다 온몸이 아프고 무기력해졌다. 나 대신 칼자루를 쥐고 맞섰던 부엉이도 지친 건 마찬가지였다. 서로 말이 없이 반나절을 그대로 흘러 보냈다. 완전히 어둠이 내리고 나서야 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린 듯 부엉이의 손동작이 빠르게 움직이며 영화를 찾기 시작했다. ‘ 잠깐만, 거기 그거 멈춰봐 줘’ 세 여자가 옅은 미소를 띠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영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볼까?’ 부엉이는 말이 없이 영화를 볼 준비를 했다. 냉장고에 남아 있던 맥주 한 캔과 굴러다니고 있던 과자 봉지를 들고 와 자리를 잡았다. 내가 고른 영화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카모메 식당>이었다. 영화 <카모메 식당>은 핀란드 사람들 눈에는 아이처럼 보일 만큼 체구는 작지만 신념이 있고 긍정적인 사치에(주인공)가 핀란드의 수도인 헬싱키에 일식당을 차리면서 시작한다. 오니기리(주먹밥)를 대표 메뉴로 내놓고 손님이 오기만을 기다리지만 한 달째 손님이 없다. 그 사이 또 다른 주인공인 미도리와 마사코 씨가 <카모메 식당>으로 들어오며, 영화는 활기를 더 한다. 처음에는 혼자였던 <카모메 식당>은 어느덧 사치에의 바람대로 사랑방 같은 공간으로 변해가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소박한 사건들, 킨포크 라이프, 결핍이 무뎌지는 공간 그리고 숲. 영화는 끝났지만 나에게 전해졌던 파장은 영화만큼 느리고 오랜 시간 머물렀다. 그 뒤로 몇 주를 흘러 보냈지만, 문득문득 마사코의 캐리어처럼 무언가 중요한 걸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순간 마음속에서 섬광이 일렀다. 나는 부엉이에게 핀란드에 가야겠다며 통보하듯 말을 하고 바로 비행기를 예약했다. 당시 우리의 일상에는 여유가 없던 터라 그냥 되는 날로 예약을 했다. 다녀오고 나서야 우리가 갔었던 5월은 핀란드를 여행하기 최적인 날이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핀란드에서도 헬싱키에서만 머물기로 결정했다. 숙소도 한 군데, 숙소를 정하고 나니 바로 앞에 여객선 터미널이 있었다. 배를 타고 싶다는 생각에 에스토니아 탈린도 2박 끼어 넣었다. 그렇게 완성된 6박 7일의 여행 일정.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멀리 그리고 오랜 시간을 내어 준 여행이었다. 이 여행을 시작으로 우리의 삶은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photographer moonji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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