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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jiin Jul 22. 2024

다정한 나의 노란 집

우리는 새벽에 유럽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까’






 드디어 페리에 탑승한 우리는 곧장 식당가로 향했다. 기본적인 욕구부터 충족시켜 줘야 했다. 도전 정신은 잠시 내려놓고 익숙한 음식들 위주로 가져왔다.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는 나중에 휴대폰으로 촬영해 놓은 사진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다음으로 충족시켜줘야 할 것은 잠이었다. 페리를 타게 되면 면세점도 가고, 하고 싶었던 게 많았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잠에 취약한 나는 허기를 달래고 나니 그대로 눈이 감아졌다. 정신이 든 건 누군가의 인기척 때문이었다. 잠에 취해 여행 중이라는 걸 잊었는지, 생각보다 몸의 긴장도가 높았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 보니 10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 친구가 나보다 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손에는 인천 공항부터 함께한 내 목베개가 들려 있었다. 미안함 위로 고마움이 쌓였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아이는 가족에게로 향했고, 나는 자기 집처럼 자고 있는 부엉이를 깨웠다. 그 사이 배는 무사히 탈린에 도착했다.




먹었던 기억이 없는 첫 식사











'스릴러의 한 장면'


 터미널에서 빠져나오니 이미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터미널 앞에는 손님을 태우기 위해 택시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중 한 대의 택시를 잡아 탄 우리는 기사님께 주소지를 보여드렸다. 택시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세상이 암흑으로 변했다. 5분이 지났나? 짧은 주행 끝에 택시는 후미진 골목길로 들어섰고, 곧이어 우리를 골목길 어딘가에 내려줬다. 주소로 봐서는 이 근처라고 어딘가라고 했다. 어둠도 잠을 자고 있을 거 같은 고요함. 아니 고요함을 넘어 적막함까지 느껴지는 거리였다. 그 길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 둘, 기가 막힌 타이밍에 먹통이 된 와이파이, 그리고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 모든 게 암울하게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켜져 있는 가로등 하나를 등대 삼아 우리는 노란 집을 찾기 시작했다.  


'노란 집, 노란… 집..' 아, 어둠 속에서 노란 집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캐리어를 끌고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려 봤지만 Indrek이 말한 노란 집은 찾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온갖 잡스러운 생각이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혹시 택시에서 잘 못 내린 건 아닌지, 아니면 사기를 당한 건가? 이대로 길거리에서 잠을 자야 하나? 한번 안 좋은 생각이 들어오기 시작하니 머릿속에서는 스릴러 한 편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새벽에 아무도 없는 유럽 주택가에서 길을 잃다니, 영화 도입부로 너무 잘 어울릴 거 같았다. 그때 조금 멀리서 '찰박찰박'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도입부를 지나 중반부로 향해 가던 내 상상력에 박차를 가하는 소리였다. '찰박', '찰박' 빗물에 부딪히는 발소리는 점점 커졌고, 빨라졌다. 우리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뚫어져라 바라봤다. 머지않아 주인공의 실루엣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주인공의 정체가 쏟아지는 비를 피해 어딘가로 가고 있는 여자라는 사실에 더 이상 내 영화는 흘러가지 않았다. 영화가 다시 시작된 건 여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였다. 혹시 길을 잃었냐는 물음과 함께 주소를 알려달라는 그녀. 스릴러라고 하기에는 너무 따뜻한 전개였다. 그녀는 비를 맞아가며 우리가 아까 헤맸던 골목, 골목을 누비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찾지 못했는지 희망 가득한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줘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미안해, 못 찾겠어’라고 말했다. 우리는 애써줘서 고맙다며 말보다는 눈으로 그녀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행운을 빈다는 그녀의 말에는 핫초코처럼 따뜻함과 달콤함이 가득했다. 서로의 안녕을 빌며 헤어지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우리 시야에 불빛이 들어왔다. 처음 택시에서 내렸던 자리에서 건너, 건너에 있던 집이었다. Indrek였다. 연락이 끊긴 우리가 너무 늦어져 찾으러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Indrek은 우리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지만, 우리의 행색이 물에 흠뻑 젖은 두 마리 생쥐였기에 하려던 말을 멈추고 서둘러 집으로 안내했다. 짧게 숙소 소개를 마친 Indrek은 따뜻한 물로 씻고 푹 쉬라는 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새벽 1시 30분. 드디어 안전하다는 곳에 들어왔다. 비를 피할 수 있고, 어둠에서 해방시켜 줄 불빛이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감사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풍족스러운 기분을 오래 느끼고 싶었지만 속옷까지 젖은 상태라 몸이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따뜻한 물에 씻고 나와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리고 맥주 한 캔을 땄다. 아까와 같은 고요함이 맴돌았지만, 아늑한 고요였다. 그 상태로 소파에 안겨 오늘 하루를 되돌아봤다.











'꿈'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을까,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을까, 하루동안에 받았던 감사함이 나를 다독거리며 잠재워줬다. 그리고 꿈을 꿨다. 꿈속에서도 나는 잠을 자고 있었다. 눈을 간지럽히는 햇빛 덕분에 겨우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온몸에 칭칭 감겨있는 이불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눈을 떴다. 빳빳하게 널브러진 수건들 틈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나, 둘 수건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수건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니 엄마가 있었다. ‘엄마’라고 부르니 엄마가 너무나도 다정한 목소리로 ‘우리 딸, 한숨 푹 자고 일어나더니 더 예뻐졌네’라고 말해줬다.



끝나지 않았을 거 같았던 하루가 마치 꿈같고, 꿈이 현실 같았던 묘한 기분이 들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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