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몰입하는 순간
그림일기
헬싱키로 가는 페리에서 기억은 탈린으로 오던 그 날 보다 선명하다. 파란 물감을 쏟아부은 것 같은 파란 하늘 사이로 조각난 햇살들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만질 수도, 마주할 수도 없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들어 햇살을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나를 바람이 다독거려 줬다. 마음이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이 기분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페리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그날을 기록했다.
나는 글자로, 부엉이는 그림으로-
당시 부엉이와 나는 취미 생활로 시에서 운영하는 그림에 문외한 왕초보도 들을 수 있는 ‘여행, 드로잉으로 담다'라는 수업을 듣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부엉이는 함께 수업을 들으며 안면을 익힌 몇 사람에게 ‘이번 여행에서 목표는 그림일기를 그려보는 거예요’라며 야심 찬 포부를 드러냈다. 그 말을 들은 우리보다 열 살쯤 많아 보이는 언니들은 유치원생을 다루듯 ‘어~~ 대단하네, 그래요?’라며 공감하며 흘러 보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부엉이의 그림은 묘하게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는 그림이었다. 유아 수준의 그림 실력에 섬세할 정도로 그 사람의 특징을 그려냈다. 한 번은 이제 막 수업을 시작하고 2회 차 수업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수업 내용은 마주 앉은 상대방 얼굴을 그려보기였다. 첫 수업 이후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진행된 수업이었지만, 당시 부엉이 맞은편에 앉아 부엉이의 그림의 대상이 되었던 언니는 흐릿하게 갈겨진 본인의 얼굴을 보고는 ‘아니, 내가 이래요?’라고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당황한 부엉이는 집으로 돌아와 내가 그렇게 못 그렸어?라고 물어왔고, 나는 '아니, 못 그렸다기보다는 조석 작가의 ‘마음의 소리’에 나오는 인물 같은 느낌이야'라고 말했다. 그 뒤로 부엉이를 조금씩 알아갔던 언니는 상했던 마음은 풀었지만 부엉이의 그림 실력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부엉이에게 그림이라는 건 너무 어색한 존재였다. 여행을 기록하는 우리의 주된 수단이 영상과 사진이기에 이미 짐이 넘쳐났지만, 부엉이는 그림일기를 그리겠다며 작은 스케치북과 각종 도구들을 챙겼었다. 그렇게 나는 일기장에 일기를, 부엉이는 그림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풍채가 좋은 여 댄서가 왈츠를 추듯 넘실거리는 페리의 움직임에 한동안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정신없는 지금 상황을 써 내려갔고 약 10분의 시간이 흐르고 나니 어느새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고 일기 쓰기에 집중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먼저 펜을 내려놓은 나는 아직도 열중하고 있는 부엉이를 천천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나머지 한 손에는 펜을 쥔 채 한참을 스케치북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말하며, 시작할 점을 찾기 시작했다. 몇 번 슥슥 거리더니 이내 스케치북을 뜯어냈다. 그렇게 몇 장의 스케치북이 희생되고 나서야 부엉이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모습이었다. 이제 부엉이에게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가 선택한 저 사진을 어떻게든 비어있는 종이 위에 채워 넣어야 했다. 완벽하게 순간에 집중한 그 모습이 조금은 벅차오르기도 했다.
부엉이의 관찰이 끝난 건 우리와 음료수를 나르고 있는 웨이터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발소리 때문이었다. 다시 페리가 왈츠를 추기 시작했고, 온갖 소음이 다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부엉이의 세상은 깨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