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라는 말은 참 무섭다.
그 단어를 들을 때면, 지금 내 눈 앞의 모든 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덜컥 겁부터 난다.
내가 지금까지 쏟아부은 돈과 시간이 얼마인데.. 이제와서 포기라니. 상상만해도 아찔하다.
누군가에게 '나 그거 포기했어'라는 말을 입 밖으로 하기도 힘들거니와 누가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걸 듣고 있기에도 맘이 편하지 않다.
그러니 어느 누구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어쩌면 '포기'일지도 모른다.
특히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할 때면 상처의 크기는 배로 커진다.
처음엔 상실감이 몰아치다 이내 자존심이 상한다. 시작할 때의 호기로운 내 모습이 떠올라 한 번 민망하고, 감춘다고 해봐도 재채기처럼 터져 나오는 당혹감에 두 번 민망하다.
그래도 주변 사람을 위한 적절한 변명 정도는 생각해놓아야 할 텐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스스로가 겪는 좌절감은 제곱으로 늘어난다.
며칠 전 후배의 SNS에 올라온 글을 읽었다. 꽤 장문의 글이었다.
3년 전 큰 결심을 하고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가 국가공무원에 도전한다고 출사표를 던진 녀석이었다. 누구보다 잘할 것이라 믿었고 늦은 시작이었지만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이제 그 도전을 접고 조금 더 현실적인 대안을 찾을 것이란 말을 어렵게 꺼냈다. 번번히 마시는 고배와 현실의 벽에 부딪히다보니 꽤나 지친 것 같았고, 자신보다 오래 준비해 온 경쟁자들에게서 위기감도 느낀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서 멈추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조금 더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 맞는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녀석에게 뭐라고 위로와 응원의 한 마디를 보내고 싶었지만,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런 힘든 결심을 한 사람에게 '좋아요' 나 '슬퍼요' 버튼 하나 눌러주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타임라인을 내려가는 행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후배의 글을 읽고 텁텁한 마음이 가시지 않은 이유는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녀석은 거듭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 대상이 부모님이나 가까운 친구도 아니었는데,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거듭 미안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미안할 일이 아닌데... 미안한 마음이 앞서면 안되는데...'
발 근처에도 닿지 않을 위로를, 그렇게 내 혼잣말로 되뇌였다. 가장 힘들었을 사람은 본인인데 그리고 지금도 가장 혼란스러울 사람은 바로 너인데, 뭐가 그렇게 미안하다고.
뜬금 없지만 사전을 열었다. '포기'라는 단어를 이 두껍고 냉정해보이는 놈은 뭐라고 정의하는지가 궁금했다.
'1) 하려던 일을 도중에 그만두어 버림'
그래. 꼭 틀린 말은 아니니 이 정도 뜻은 그렇다고 치자.
'2) 자신의 권리나 자격, 물건 따위를 내던져 버림'
.........
따뜻한 단어도 사전에서 찾으면 차갑게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철렁했다.
꼭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무언가를 포기하는게 정말 내가 가진 소중한 권리나 어렵게 얻은 자격을 매몰차게 내던져 버리는 것일까.
서러울 만큼 궁금했다.
사전적 의미의 무서움을 알고 나서는 쉽사리 '포기'란 단어를 쓸 수 없겠다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른 대체어를 찾아야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괜시리 감성적이 되어 사전에 항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문득 6년전 광고회사에서 인턴을 하던 때가 떠올랐다. 꽤나 오랫동안 한 켠에 묵혀둔 기억이었다.
광고주의 무리한 RFP(제안 요청)에 팀 전원이 명절을 반납하고 밤을 새며 제안서를 준비한 적이 있었다. 일주일 남짓한 시간에 준비한 것 치고는 꽤나 만족스럽다고 자평했지만, 광고주를 만나고 온 대표님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광고주가 제시한 대안은 두 가지였다. A는 우리가 제안한 아이디어의 극히 일부만을 사용하는 것이었지만, 나쁘지 않은 금액의 제안이었다. B는 다소 무리한 요구가 섞여 있었지만 추후 정식 계약을 통해 더 큰 프로젝트를 맡게 해주겠다는 보장이 붙었다.
자정이 넘어 이어진 회의에서도 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당시 나는 인턴의 신분이라 회의실 한 구석에서 입을 꾹 닫고 눈치만 보던 게 기억난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광고주에게 의사 통보를 해야하기 하루 전에 이르자, 대표님이 모두를 소집했다.
다들 아무말이 없었다.
에이전시에게 광고주의 제안을 거절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다들 알기에 모두 착잡한 표정이었다.
명절도 반납한 채 퍼부은 노력. 잠을 쫓으려 마신 수십잔의 커피. 목이 잠길 때까지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던 그 시간들이 터널 속 불빛처럼 지나갔다.
'우리 입맛에 맞는 게 없으면 어쩌겠냐. 식당 들어가 메뉴판까지 들었어도 아니다 싶으면 놓고 나와야지.
너무 상심하지마라. 틀린 길을 꾸역꾸역 가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다.'
힘겨운 회의가 끝나고 팀원 전체가 진탕 술을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표님은 인턴인 내가 앉은 테이블 끝자리까지 와서 나에게 술을 부어주셨다. 뭐든 첫경험의 기억이 좋아야하는데, 나에게 거절하는 법부터 보여준 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셨다.
지금도 그 날의 모습과 단어 하나까지 떠오르는 걸 보면 내가 받은 감동도 적지는 않았나보다.
요즘 들어 특히나 예전 대표님의 그 말이 자주 떠오른다.
포기나 좌절이 아닌 조금은 더 인간적인 말, '내려놓기'.
내 손에 들고 있던 것이 내 것이 아니기에,
아니 어쩌면 내가 감당할 무게가 아니었기에,
무리해서까지 들고 있던 그 부담감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두는 것.
어쩌면 우리는 그 당연한 이치의 행동을 '포기'라는 단어로 오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타자인 행크 아론(Hank Aaron)은 자신의 '선구안(選球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투수가 던지는 공은 딱 두 가지다. 내가 칠 수 있는 공과 없는 공.
내가 칠 수 없는 공을 걸러낼 줄 알면 승부는 끝난다.'
백 번 들어도 맞는 말이다. 투수의 구종이 수십가지라고 해도, 거기에 구속을 조합하면 경우의 수가 천문학적으로 바뀐다고 해도 내가 칠 수 없는 공은 그저 '내 공이 아닐' 뿐이다.
우리는 인생이란 타석에서 얼마나 좋은 선구안을 발휘하고 있을까.
내가 칠 수 있는 공이 아님에도 끝까지 배트 한 번은 휘둘러봐야 직성이 풀리는 고약한 버릇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더 좋은 공을 기다리는 현명함의 순간을 비겁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내려놓는 것'은 죄가 아니다.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에게 미안할 일도 아니다.
자신의 권리나 자격을 내던져버리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지금 당신의 손에 있는 그 걸 내려놓는다고 해서 벌어질 비극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다음 공'을 기다리면 된다.
illustration by Jorge R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