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릴 땐 누군가 내게 '뭐가 되고 싶니?'라고 물어봐 주는 게 좋았다.
날마다 하고 싶은 것이 바뀌기도 했거니와 내가 대답했을 때 상대방의 반응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맞장구를 쳐주면 마치 내 꿈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서 신이 났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사람을 만나면 더 열정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피력했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멋진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고 소설속 주인공들은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 본인들의 꿈을 이루게 될 거라는 사실에 함께 공감했다. 그리고 세상의 한 조각으로 태어나서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나 못 이뤄보고 죽는다는게 한심하게도 느껴졌다. 내가 바라보는 어른의 세상은 그런 세상이었다.
#2.
'뭐가 되고 싶니?'라는 물음이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중학교 때까지 해오던 운동부 생활을 그만두고서 그저 평범한(?) 학생의 신분을 되찾았을 때, 사람들은 내게 걱정스레 물었다. 정확히 말하면 '뭐가 되고 싶니'가 아니라 '이제 뭘 할거니'라는 질문이 날아왔다.
그 질문 속에는 '나도 힘든 처지지만 너는 더 막막하겠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녹아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천재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채 운동선수의 길을 접고 그냥 학생이 된다는 건 이미 어두운 앞날에 다시 한 장의 검은 천을 덧씌우는 것과 같았다.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답했다.
'글쎄요... 천천히 생각해보려구요'
그 때마다 사람들은 '생각해본다'는 내 말에는 주목하지 않은 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천천히?'
#3.
대학의 문턱을 넘으면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은 '넌 졸업하면 뭐 할거야?'라는 꽤 구체적인 질문으로 바뀌었다. 그건 너의 진짜 꿈이 궁금하다는 뜻이라기 보단 졸업 후 계획이 어떻게 되냐는 정도의 물음이었다.
나름 큰 포부를 이야기하면 뜬구름 잡는다는 핀잔을 들었고, 그렇다고 내 꿈의 사이즈를 애써 다이어트까지 시켜가며 말하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 이후로는 점점 스스로의 꿈을 입밖으로 내는 일이 적었다. 아주 친한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그냥 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더 편했다. 사람들이 반문할 만한 이야기를 꺼내어 감정 소모의 대화를 시작하는 것에 점점 지쳐가기 시작한 나이, 그 때 내가 스물 중반을 넘기고 있었다.
#4.
회사에 와서는 아예 그 질문이 사라졌다. 누구도 내게 그렇게 묻지 않았다.
'이번 휴가 때 어디 갈 거니?', '결혼은 언제 할 거야?', '언제까지 이 회사 다닐거야?'
이젠 본인들이 관심있는 분야 속에서의 질문들을 정해놓고 나에겐 그저 언제 그걸 할거냐는 계획만 물어올 뿐이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라는 대답은 이내 '그러게..'라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러게'는 참 좋은 대답의 도구였다. '니 말에 동의는 하지만 딱히 그럴 생각도 의지도 없고 나도 내 자신을 잘 모르겠는데, 적어도 그걸 가볍게 여기진 않아'라는 아주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는 대답.
YES맨도 NO맨도 아닌 '그러게 맨'이 되어가기 시작하는게 어른이 되어가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5.
시간이 흐르면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고민의 깊이가 깊어지기 보다는 답변의 스킬이 늘었다.
설득의 노력보다는 회피의 재치를 발휘했다. 생각의 공유보다는 독백이 시간이 편했고 그렇게 점점 나는 나 자신에게도 '뭐가 되고 싶은 거지.. 대체'라는 질문을 줄여갔다.
이상하게도 슬프지는 않다. 아쉽지도 않다. 가끔은 꿈을 가지라는 유명인들의 말이 피곤하게도 느껴졌으니 잘됐다 싶기도 했다.
컴퓨터 전원을 켠채 하얀 바탕화면 위에서 뭘 해야할지 몰라 애꿎은 마우스 커서만 빙빙 돌리는 그 행위 자체가 곧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속으로 나지막히 말했다.
'뭐가 되고 싶은지.. 좀 모르면 어때..'
illustration by Jorge R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