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의 치기도 마흔살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 애매한 시간 속의 나
#1.
어린 시절엔 서른이 그런 나이인줄 알았다.
TV 뉴스에 나오는 내용들은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왠만한 법적 지식과 금융 상식도 꿰뚫고 있는 나이.
누가 질문을 해오면 현실적이지만 멋지게, 어른스럽지만 결코 꼰대같지 않은 대답을 해줄 수 있는 그런 나이.
서른 살 즈음이 되면 아이가 걸음마 배우듯 그리 거대한 노력 없이도 다 그렇게 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나서 진짜 서른 살이 되었다.
#2.
대한민국에서 서른살이 된다는 건 이름표만 바꿔 달아주는 것과 비슷한 의미였다.
더이상 휴학을 할 용기도 여력도 없이 맞이한 대학 졸업과 조여오는 죄책감 속에서 겨우 문턱을 넘은 취업.
그리고 이제서야 내 손으로 학자금 대출을 갚아나갈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에 잠시 안도를 하며 맞이하는 나이.
나 자신을 모른채 스무살이 되고 ... 대학생이 되었는데,
크게 달라지는 것 없이 다시 서른살이 되고 또 사회인이 된다는 건 슬프기보단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3.
한 때는 우쭐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름 직장인이 되었고 내 손으로 돈을 번다는 사실이 기뻤다.
20대 초반의 어린 동생들이 고민 상담을 하면 최대한 어른스럽게 잘 대답해주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해 걱정이 쌓여있는 친구들에게는 소주 한잔 사주며 푸념을 들어주었고
한편으로는 일과 가족,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삶의 균형을 맞춰가는 팀장님을 롤모델로 삼았다.
'서른, 이제 시작'이라는 말이 실감났고 나도 의욕으로 벅차 올랐다.
#4.
그러다 우연히 나 스스로를 들여다 볼 시간이 생기며 조금씩 현실을 알아갔다.
남들은 이제 내가 진짜 어른이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어른이 된 것인지 그 과정이 기억나질 않았다.
드립커피처럼 한방울 한방울 거름종이를 타고 내려온 순도 100%의 내가 추출된 것도 아니고,
새로운 대본을 받고 크랭크인을 기다리는 배우처럼 한 순간에 달라진 내 인생으로 몰입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여전히 나일 뿐인데,
그런 나를 더러 '진짜 어른'이라는 이름표를 바꿔 달아주었다.
#5.
서른은,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점점 더 멀어져가는 그런 노래 가사 같은 것이 아니었다.
뭘 그려야 할지 모르는 내 앞에 하얀 스케치북 하나가 놓여 있고,
약간의 책임감과 또 약간의 해방감 ...
그리고 '현실감 없어진 현실'이 버무려진 이상한 색의 크레파스 하나가 손에 쥐어지는 그런 것에 가까웠다.
스무살의 치기도 마흔살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 애매한 시간 속의 나.
나는 그런 서른을 살고 있었다.
illustration by Jorge R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