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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May 29. 2023

격의 없는 사이는 있어도, 예의 없는 사이는 없다.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18

01. 

잠시 멈췄던 독서모임을 4개월 만에 다시 시작했습니다.  아예 모임 자체를 ⟪기획자의 독서⟫라는 타이틀로 운영하고 있는지라, 매회 주제를 '기획자의 OOO'으로 잡아서 매번 다른 키워드로 멤버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키워드는 '기획자의 커뮤니케이션'이었죠. 언제가 한번 꼭 다뤄보고 싶었던 키워드여서 아껴놓았는데 이번 기회에 독서 모임 테이블에 올려본 것이었습니다. 


02. 

당연히 각자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부터 좋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기준, 그리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들까지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저 스스로에게도 한번 질문해 보게 되더군요. '나는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하고 말이죠.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상대방이 싫어할 만한 커뮤니케이션 요소를 먼저 파악하려고 힘쓴다'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이 원하는 방식의 커뮤니케이션,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고민하기 이전에, 그 사람이 커뮤니케이션을 함에 있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려는 것이죠.  


03. 

저는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상대방이 좋아하는 99가지를 해주는 것보다 가장 싫어하는 한 가지를 피해 갈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죠. 아무리 화가 나고 서로에게 실망하는 순간이 있더라도 상대방이 가장 싫어하는 말과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법이니까요.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전략, 기술, 메시지, 매체 등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그래도 가장 기본은 말하는 화자의 매너가 아닐까 싶습니다.  


04. 

개인적으로 '격의(隔意) 없는 사이는 있어도, 예의(禮儀) 없는 사이는 없다'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격의란 '서로 터놓지 않는 속마음'을 뜻하고, 예의란 잘 아시다시피 '존경이나 존중의 뜻을 표하기 위해 갖추는 말투나 몸가짐'을 가리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단어의 뜻 속에 이미 인간관계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내 모든 속마음을 털어서 보여줄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존중의 자세를 갖출 필요가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죠. 그러니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간에 '격의'가 있을 순 있어도 '예의'가 사라지는 순간 관계는 파국을 치닫게 됩니다.  


05. 

그래서 저는 상대방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그 사람이 가장 예민해하는 순간이나 그 사람의 가치관에 반하는 말 혹은 행동이 무엇일지를 최대한 파악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건 상대방의 단점을 보라는 얘기와는 전혀 다릅니다. 이를테면 상대가 못 먹는 메뉴가 테이블에 올라왔을 때 그로부터 음식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놔주거나 혹은 아예 주문할 때부터 제외해 주는 배려와 같은 거니까요. 이런 시각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게 절대 부정적으로 사람을 보거나 색안경을 끼는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06. 

그리고 생각보다 사람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커뮤니케이션 유형 혹은 태도를 자주 표현하곤 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꽤 자주 친한 사람들에게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게 되죠. 그중엔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들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그 상대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본인을 힘들게 한다는 것에 대한 토로일 때가 많습니다. 때문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다른 사람이 지양하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쉽게 파악할 수 있죠. '메일이나 메신저를 두고 왜 굳이 전화해서 설명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멀쩡한 업무 시간 놔두고 굳이 점심시간이나 퇴근 전에 메일을 보내야만 하는 걸까', '논문 쓰는 것도 아닌데 줄글 말고 bullet-point로 딱딱 핵심만 설명하면 좋겠다' 등등 그 내용도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한 것들입니다. 


07. 

저는 예의에도 객관적인 예의와 주관적인 예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커뮤니케이션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상식 위에 우리가 소통해야 할 대상의 주관적인 호불호가 함께 녹아있다고 봐요. 어쩌면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게 더 힘들게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1:1, 1:N, N:1처럼 일대일과 일대다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환경에 각각의 커뮤니케이션을 조합하면 아마 그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할 테니까 말이죠.  


08. 

독서모임 멤버 중 한 분께서 4년여 가까운 시간 동안 맡았던 대표직에서 떠나 회사 고문으로 포지션을 옮긴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함께 일한 직원들이 마지막으로 써준 감사 편지에서 본인을 '회사 안의 소통왕이셨다'로 표현해 준 사실이 참 인상 깊고 감사하다고 하셨죠. 평소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려 애쓰고 본인의 역량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손을 걷어 붙인 게 그런 평가를 끌어낸 게 아닌가 싶다고 하셨습니다.  


09. 

그러고 보면 소통의 의지가 큰 사람은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해요.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제 학창 시절 때만 해도 공부에 흥미가 없거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끝까지 설득해 좋은 방향으로 움직여보려는 선생님들이 계셨거든요.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았습니다만... 어쨌든) 딱히 본인에게 주어지는 인센티브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마지막까지 소통의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당신들의 모습이 아직까지 기억나는 것을 보면 좋은 지도자이기 이전에 좋은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역할을 먼저 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도 싶네요.  


10. 

말이 나온 김에 저도 한 번 다시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말로만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외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세심한 소통 매너를 갖추려고 노력하는지, 그리고 '이런 건 안 먹히네', '저 사람이 들을 생각을 안 하네'라는 단언 대신 마지막까지 한 번 더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해보려 애쓰는 사람인지 저 스스로를 한 번 돌이켜 봐야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게 커뮤니케이션인 만큼, 여기에 드는 고민과 노력은 조금 과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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