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내내 구석진 자리를 좋아했다.
이왕이면 햇빛이 가장 적게 드는 오른쪽 끄트머리 자리를 선호했고, 맨 뒤에서 한 줄 앞이 더 유리했다. 엎드려 자고 있을 때 내 뒤가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보다는 한 거풀이라도 보호막이 있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선생님들 시야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만큼 행동 반경도 줄어들었다. 교실 반대편에 있는 친구들과는 서로 국경 검문소를 사이에 둔 것 마냥 교류가 없었다. 여름이면 이른바 선풍기 사각지대에 속한 터라 시원한 바람 한 번 쐬보지 못했고 겨울이면 덜덜거리며 복도 창문으로 스며드는 냉기를 막는 인간 방패막이가 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하나의 공간 안에서 맨 구석만을 지향했고 그로 인해 포기해야하는 것들은 깨끗이 인정했다.
대학을 와서도 강의실 앞이나 가운데 앉는 법은 없었다.
대신 정해진 좌석도 없고 강의실도 옮겨다녀야 하는 대학 수업 특성상 꽤 부지런을 떨어야 구석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았던 건 아니지만 구석진 자리가 주는 안락함이 좋았다.
오른쪽엔 가로막힌 시멘트 벽이 서있고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적당히 어두운 분위기가 깔려 있으며, 전체를 아우르듯 뒷 편에서 다른 사람들의 뒷 모습을 보는 뷰가 제법 시원하기도 했다.
친구들은 내가 일찍 강의실에 도착해서도 구석자리를 찾아가는 걸 보고 히키코모리 병이라 이야기 했다.
생각해보면 학창시절에도 그리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난 뒤에도 특정한 공간의 가운데에 들어가는 것엔 이질감이 있었다. 자기 소개를 위해 무대 앞으로 나가 인사를 해야할 때도 최대한 다른 사람들을 비켜나 양 끝쪽을 찾아 숨어들곤 했다. 어쩌다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을 만나면 서로 한 자리라도 더 끝으로 가보겠다고 파도타기 같은 싸움을 해야했다.
이런 구석진 공간을 찾아다니는 이유를 나름 그럴싸한 논리로 설명한 심리학 책들도 있었다.
사람은 원래 열린 공간 보다 구석진 곳에서 안정감을 느낀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혹은 엄마 뱃속의 태아 시절과 비슷한 환경을 찾아 본능적으로 구석진 곳으로 간다는 설명도 있었다.
저명한 교수들의 말이니 굳이 아니라고 반기를 들어봤자 나만 손해일 거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이유가 좀 달랐다.
학창시절부터 교실 환경에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선생님들과 소통을 잘하는 친구들은 주로 가운데에 앉았다. 어떤 친구는 선생님과의 아이컨택을 담당했고 다른 친구는 리액션을 맡았다.
그나마 학기 초에는 교실 전체를 바라보며 눈빛을 주던 선생님들의 시야도 점점 좁아졌다.
그렇게 나는 주류에서 멀어지는 법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익혔고 그 룰을 따라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이제 회사원이 되었으니 족히 20년은 그런 생활을 해왔던 것 같다.
그러다 작년에 (꼭 1년 전이다) 파리로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워낙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하는터라 매번 팀원들과 돌아가며 한 명씩 식사를 해야했고, 그날도 어김 없이 혼자 15구 근처 도로의 어느 식당에 들어가 런치 메뉴 하나를 주문했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 살아온 방식 그대로 가게 안의 넓은 자리들을 두고 구석진 자리를 택했다.
시간도 없고 일행도 없으니 얼른 먹고 나가자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그 때 한 웨이트리스가 내가 앉은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 이렇게 햇살이 좋은데, 왜 구석에 앉으세요?
- 아, 전 구석이 편해서요.
- 구석이 편하다구요? 지금은 손님도 없어서 이렇게 넓은 공간을 당신 혼자 쓸 수 있는데도요?
- 글쎄요, 전 항상 구석진 곳에 앉았던 것 같아요. 교실에서도 .. 도서관에서도요 ..
- 음 .. 혹시 뱀파이어인 건 아니죠? 하하 !
처음엔 왠 오지랖인가 싶었다. 여행 블로그에서는 분명 파리 사람들이 불친절 하다고 했는데 이런 캐릭터도 있구나 했다. 아니다.. 자기 가게에 처음 온 손님에게 뱀파이어라니.. 이건 신종 인종차별인가. 당당하고 거세게 맞받아쳐야 하나 싶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어디에 앉든 그건 당신 자유에요. 여긴 파리니까요.
- 아.. 네.. 그렇죠
- 하지만 오늘처럼 날씨 좋은 날에는 손님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추천해주는 것 또한 내 임무죠.
저 가운데 자리에서는 이 거리를 지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어요.
운이 좋으면 멋진 파리지엔느 여성과 눈이 마주칠지도 모르죠.
그리고 가게 앞에 심어 놓은 꽃 향기를 맡기에도 최적의 자리에요. 내가 직접 심은 꽃들이거든요.
이 정도의 친절이면 자리를 옮겨주는 게(?) 예의인가 싶어 못이기는 척 웃으며 소지품을 챙겨 일어났다.
옮긴 자리는 그 넓은 레스토랑에서 가장 한 가운데 자리였다. 아마 한국에서 그렇게 앉아 홀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면 길을 지나는 사람 중 열에 아홉은 날 가게 사장님이라고 생각했을테다.
내 돈 내고 와서 밥을 먹는데 이렇게 불편하게 먹어야 하나 싶어 속으로 투정부리고 있을 때쯤 웨이트리스가 다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 딱 좋아요! 그거에요! 이제 좋은 자리의 '맛'을 봤으니 앞으로는 구석진 곳을 찾을 일이 덜할 거에요.
사람들은 대부분 익숙지 않는 것에서는 장점(bright side)을 발견하려고 하지 않죠.
아마 그 때 애써 웃으며 우걱우걱 햄버거를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선 꽤 오랫동안 잊고 있다 수 개월이 지나 그 때의 일이 떠올랐다.
종종 회사에서 진행하는 단체 세미나 형식의 강의를 들어야 할 때가 있다.
그날도 어김 없이 나는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았고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가운데 앞자리를 덩그러니 비워놓은 상태로 양 측 끝 자리에 몰렸다.
그러자 강단에 올라선 임원분이 말했다.
- 가운데 앞 자리로 좀 오세요. 왜 다들 구석에 가 계시나요.
다음 번에는 양 측면 자리는 못앉도록 해야겠네요. 그래야 가운데에 앉으시겠죠?
분명 농담이었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파리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동안 왜 내가 그렇게 구석진 자리를 굳이 고집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가운데 자리의 좋은 점을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해야 맞겠다.
대신 다들 '왜 거기에 앉느냐, 어서 이 가운데로 오라'는 말 뿐이었다. 구석진 자리에 앉는 건 너의 자유지만 나라면 여기 이 자리에 앉겠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구석진 자리에 대한 나의 취향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살다보면 '그 때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 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이라는 아쉬움이 들 때가 있다. 나에겐 서른이 넘도록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지구 반대편 타국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우연히 그 얘기를 들려줬다는게 아쉽고도 고마웠다.
그 뒤로 더 이상 구석진 자리에 앉지 않느냐고?
아니,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에서도 맨 구석 안쪽 자리에 앉아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막연하게 구석자리만을 찾는 버릇은 많이 줄었다. 때로는 탁 트인 공간의 한 가운데 자리에 앉아보기도 하고 내가 듣고 싶은 강의가 있으면 (맨 앞줄 한 가운데는 아니더라도) 나름 중앙 자리를 차지해 보기도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구석진 곳을 찾는 건 다른 한 쪽이 막힌 공간에서 느끼는 나름의 위안이었는지도 모른다.
작게나마 보호막이 있다는 것,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는 그 이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가운데 공간이 가지는 이유와 의미를 알았으니 조금씩 두려움이 없어졌다.
그리고 정말 그 웨이트리스의 말처럼 나는 익숙지 않은 것에서 장점을 보는 것에 인색하다는 걸 알았다.
다시 파리의 그 가게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이번엔 당당히 가운데 가장 밝은 자리에 앉아볼 생각이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가게 점원이 직접 심은 꽃의 향기 그리고 구석지지 않은(?) 공간에 대해 조금은 관대해진 나의 감정을 한꺼번에 느껴볼 예정이므로.
illustration by Anna Par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