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Routine)이란 단어는 부정적으로 쓰일 때가 많다.
판에 박힌 일상이나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을 칭하기도 하고 변화 없는 삶이 얼마나 무료한지를 표현하고 싶을 때도 우리는 '루틴'이라는 말을 꺼낸다. 한국어로는 '일상'이나 '관례' 정도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영어와의 늬앙스 차이는 크다. 우리에겐 딱히 하고 싶지 않지만 굳이 반복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의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일상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산다. 일상이 지루하다고 매일 불평 하면서도 그 일상이 무너질까 걱정한다. SNS속 여행 사진을 보며 지금 당장이라도 훌쩍 떠나고 싶어하지만 이불 밖으로 발 한 걸음 떼는 것 조차 힘들어한다. 변화와 도전 같은 단어에 이유 없이 가슴이 쿵쾅거리면서도 책상 위에 놓인 액자 위치 하나 바꾸는 데도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 아이러니의 극단을 치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루틴은 그 일상 속 두려움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뭔가가 반복된다는 두려움. 내 삶에 변화가 없다는 두려움. 무의미하게 몸에 체득되어 나도 모르게 습관이 되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까지. 이를 깨보려고 간혹 소심한 일탈을 해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다시 원래대로 일상을 살아간다. 아니 정확히는 루틴이라는 관성을 통해 살아간다.
루틴이란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일은 미국 여행 중에 일어났다.
여행 일정 상 이틀에 한 번 꼴로 차가 필요했던 나는 거의 매일 렌터카 업체를 방문해야했다. 문여는 시간보다 30분만 늦게가도 긴 줄을 기다려야 하므로 매일 오픈시간 이전에 도착해 기다렸다. 그러다보면 이제 막 출근하는 업체 직원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는 항상 투명한 비닐봉지에 벽돌모양의 빵 한 덩이를 든 채 가게를 열었다.
그리고서는 컴퓨터가 켜질 때까지 잠시 기다리라며 웃어보이고는 사무실 한 켠의 티 테이블로 향했다.
어쩌면 2-3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지만 그는 아주 익숙한 손길로 그 만의 의식을 시작했다. 15년은 족히 지났을 것 같은 커피머신에서 음료를 내리고 가져온 빵을 정확히 3등분 해 그 중 하나를 접시에 놓았다. 그리고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던 스푼 하나를 들어 커피 몇 스푼을 빵 위에 적셔 놓는다. 그것도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방문하는 3일 내내 똑같은 행동이 이어지자 나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매일 만나는 그와 어느 정도 친해진 탓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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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저렇게 빵 위에 커피를 적셔놓네요. 아주 독특한 것 같아요.'
'그래요? 저에게는 매우 익숙한 일이죠. 몇 년째 계속 하고 있으니까요.'
'몇 년째요? 그럼 저 빵을 몇 년동안 매일 같은 아침 메뉴로 먹는 거에요?'
'네, 거의 매일 똑같아요.'
'대단하네요. 질리지 않나요?'
'이 곳으로 이사와서 이 직업을 가진 뒤로 꽤 오래 아침 메뉴를 시험했어요. 그러고 나서 발견한 최고의 메뉴라고 할 수 있죠.'
'당신에겐 매우 익숙한 일이 나에게는 엄청 신기하게 보이네요.'
'하하 그런가요? 익숙한 일(routine)이긴 하지만 저에겐 최적화 된(optimal) 아침식사죠. 제 하루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에요. 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일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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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대화 속에는 재미난 점이 있었다. 루틴(routine)이란 말은 그대로 두면서 계속 반대어를 덧붙이는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Routine 이지만.. 최적화된
Routine 이지만.. 흔하지 않은
Routine 이지만.. 오랜 시험을 거쳐 발견한
Routine 이지만.. 최고의
대화가 끝나고 나서야 그가 루틴의 반대말을 모두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걸 알았고 그것이 본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건 반드시 해야 하는 to-do list 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루틴을 개발하고 또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운동선수들도 저마다의 루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징크스(jinx)와 구분되지 않은 채 사용된다는 것이 아쉽다. 운동선수에게 루틴은 마인드컨트롤과 웜업(warm-up)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클레이튼 커쇼의 왼쪽 어깨 흔들기도, 스테판 커리의 낮은 자세 양손 드리블도 모두 경기 전에 꼭 필요한 그들만의 루틴이다. 이는 각자가 기억하고 있는 최적의 컨디션과 감각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인 것이다. 중요한 경기마다 무조건 빨간 속옷만 입는다는 식의 징크스와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미신의 측면에서 루틴을 바라본다......)
'반복'이라는 행위는 양날의 검이다.
의미 없이 매번 되풀이되는 무언가가 우리를 짓누르게 만들 수도 있지만 일상에 조금씩 재밌는 변화를 주어 나에게 최적화된 반복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아침에 일어나 스트레칭과 함께 하는 짧은 명상이나 혼자 밥을 먹으며 몇 장씩 책을 읽는 것도 좋다. 음악을 틀고 샤워를 하며 오늘의 할 일을 찬찬히 정리해볼 수도 있고 지하철 안에서 혼자 끄적일 수 있는 글감을 떠올려보는 것도 환영이다.
중요한 것은 반복의 이유를 찾는 것이다.
간혹 사소하지만 여러 번 반복되는 행위에 대한 이유를 고민해보면 꽤 의외의 순간과 맞닥뜨리게 된다. '왜'라는 물음은 언제나 우리를 본질과 가까운 것으로 데려다주고 무릎을 치게 하는 통찰력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려하고 대단한 직업을 가졌다고 해도 매일이 다른 삶을 살 수는 없다. 일상의 어느 순간은 반복되기 마련이고 그 순간들은 우리 인생에서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어차피 매일 마주할 순간이라면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가벼운 노력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누군가 당신에게 왜 그 일을 반복하는지를 물었을 때, '나도 몰라요', '그냥 해오던 거예요'라는 말보다 꽤 그럴싸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을지 모른다.
요즘 TV를 켜면 예능 프로그램의 절반은 유명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방송들이다.
(꿈보다 해몽에 더 가깝긴 하지만) 그중 인기를 얻는 프로그램들을 보면 무언가 더 자극적인 장치를 주어 인위적인 걸 끌어내려 하기보다는 출연자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소소한 이유와 본질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많다. 조금은 낯설고 의아한 장면을 볼 때도 잠시 후 나오는 인터뷰를 통해 당사자의 설명을 듣다 보면 제법 일리 있는 행동같이 여겨지곤 한다.
좋은 일상이란 어쩌면 좋은 루틴이 많은 일상을 뜻하는 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이유를 찾고, 나름대로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주기도 하고, 그러면서 나에게 꼭 맞는 일상을 찾아가는 실험은 분명 삶을 더 가치있게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그래야 때때로 그 일상을 깨고 모험을 감행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고, 긴 항해를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해도 괴리감을 피할 수 있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의 루틴을 소중하게 대하자. 아마도 가장 오래, 가장 많이 봐야 할 녀석들임에 틀림없으니 말이다.
illustration by Anna Par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