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를 소비할 때 우리는 '쓰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딱딱하게 말하자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내가 지불하는 또 다른 무엇'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저 우리가 가진 것의 일부를 누군가에게 내어줄 때 흔히 '쓰다'라고 칭한다. 아마 영어로는 spend 쯤 되겠다.
언어라는 것이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르다고 해도 또 묘하게 비슷한 것이, 영어사전에서 spend의 뜻을 찾아도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Spend : 1. (돈을) 쓰다 2. (시간을) 보내다 3. (에너지・노력 등을) 들이다
동사의 뜻은 다르지만 괄호 속에 붙은 목적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돈도 시간도 에너지도 노력도, 모두 계산기 두드리지 않고 쉬이 내어놓을 수 없는 것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중에도 '쓰기(spend)'에 가장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마음이다.
세상에 '마음을 쓴다'는 것만큼 쉽지만 어렵고,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때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씀씀이는 없다. 때로는 쓰고 싶지 않아도 쓰게 되는 것. 줬던 마음을 돌려받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 마음을 쓰는 행위는 그래서 예쁘고도 고달프다.
가까운 친구에게 '나 그 사람에게 자꾸 마음이 쓰여'라고 하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누군가는 '너 그 사람 좋아하니?' 라는 말을 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그거 동정심이야. 측은지심이라고. 잊어버려'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너 뭐 그 사람한테 잘못한 거 있어? 불편한 사이야?'라는 말도 들을 수 있겠다.
나에게도 마음을 쓴다는 표현과 엮인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살아오며 겪은 아주 작은 기억의 모서리지만 제법 날카로워 아직까지도 맘에 자국이 남아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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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 생활을 하다 그만두기로 결정한 건 벌써 십몇 년 전의 일이다.
코치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을 듣고 나 역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훈련 때는 엄격하고 독하기로 소문난 분이었지만 막상 제자를 떠나보내려니 어딘가 허전했는지 악수한 손을 놓지 않은 채 몇 마디를 건네셨다.
'그동안 너한테 마음이 많이 쓰였다. 좀 모질게 다그친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해줬으면 한다. 잘 가르쳐주지 못했는데도 묵묵히 따라와 줘서 고맙다.'
흘려들을 수도 있는 말이지만 문득 궁금했다. 나한테 마음이 쓰였다는 건 어떤 뜻일까. 아니 어느 때였을까.
한 달만 더, 한 해만 더 버텨보라고 다독이던 그때인가. 시합 날 함께 타고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이 녀석 중요한 경기에 가는 길이니 안전하게 운전해달라고 기사님께 간곡히 부탁하던 그때인 건가.
태어나 단 한 번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단어의 뜻을 곱씹어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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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전역하기까지 5개월을 앞두고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던 어느 날.
대대장님이 나를 불러 왜인지 모를 친근한 모드로 대해주기 시작했다. 영문은 모르지만 펼쳐놓은 과자와 믹스 커피를 주섬주섬 입으로 가져갈 무렵 대대장님이 말씀하셨다.
'남은 5개월, 나라에 봉사한다는 셈 치고 너 관심 병사 한 명 좀 전담해라.'
그렇게 나의 병장 생활은 소위 말하는 말년이랄 것도 없이 24시간 관심 병사와 함께 먹고 자고 경계 근무를 서는 것에 오롯이 바쳐졌다. 백 미터만 걸어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볼 때도, 하루 내내 암기 시킨 복무 신조를 막상 점호가 시작되니 단 한 글자도 말하지 못할 때도 그 녀석이 너무 미웠다. 단 1분이라도 일찍 제대해 더 이상 그 녀석을 안 보고 싶다는 게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러던 중 설상가상으로 훈련을 나간 다른 대원들 몫으로 녀석과 둘이서 8시간 경계 근무를 들어갈 일이 생겼다. 무료하기도 하고 해서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대뜸 녀석이 나에게 말했다.
'제가 못나서.. 김병장님 힘들게 하는 거 같아 죄송합니다. 그래도 제게 마음 많이 써주시는 거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제가 더 잘해보겠습니다.'
기분이 묘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든 흔히 군대서 편히 지내기 위한 립 서비스였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마음을 썼다고?' 난 니가 그 말을 하는 그 순간에도 미웠는데. 네 녀석에게 준 건 미움 밖에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마음을 썼다니. 엉겁결에 말을 흐리듯 대답하고 화제를 돌렸지만 그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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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딱히 기억하고 싶은 날은 아니었다.
대학을 들어가 처음으로 첫사랑이라는 것을 해봤고 그 사랑의 마지막은 생이별에 가까웠다. 여자친구의 가족 모두가 해외로 갑작스럽게 떠나야 하는 한 여름의 어느 날 밤, 여자친구의 아버지를 만나 짧게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가정에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만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어린 나로서는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당시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최대한 어른스럽게 행동해보려 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당신이 보시기에 얼마나 아이 놀음 같았을까 싶다.
'니가 우리 애한테 해준 거 나도 절대 잊지 않으마. 그리고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나도 아빠인지라 지금은 너보다 우리 아이에게 마음이 더 쓰인단다. 변명인 줄은 알지만 언젠가 너도 이 상황을 이해할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물론 아직도 그 상황을 이해하는 날은 오지 않았다. 나에겐 그저 치료 없이 시간만 보내다 제멋대로 엉켜 붙은 살덩이 속 상처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화도 나고 답답하고 복잡 미묘한 심경 속에서도 내 귀에 걸리는 문장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대체 마음이 쓰인다는 게 뭐냐고. 사랑한다는 거야 뭐야. 소중하다는 거야 뭐야. 그게 뭐냐고.
그 일 들이 있고 나서 여러 해가 지났고 나도 이제 세상에서 어른이라고 불리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조금씩 그 의미가 짐작되기는 것 같기도 하다.
아직 장님 코끼리 만지듯 본질을 빙빙 돌아 그 표면을 더듬고 있는 듯하지만 세상 살며 나름 경험이란 게 쌓이다 보니 나도 '마음을 쓴다'는 말의 의미를 점차 알아가게 되는 것일까.
마음을 쓴다는 건 어찌 보면 공간을 차지한다는 의미다.
굳이 돈을 쓰지 않아도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내 에너지와 노력을 들여 상대방에게 뭔가를 해주지 않아도 그냥 계속 신경이 써지는 것. 그건 내 마음 속 한편의 공간을 그 사람에게 내준다는 뜻이었다.
제자를 보내는 스승의 마음속에도, 후임이 미워 죽겠는 그 순간에도, 당장 살 길이 막막해 본인의 딸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을 해야 할 때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누군가를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었을 게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문을 열어 그 속을 들여다보고 괜찮은지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히 문을 닫고 마는 것. 그러고 나서도 쉽게 발길을 돌릴 수 없는 그 행위가 이제 와서 보니 모두 '마음 씀'이었다.
한때는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쓰고 싶지 않은 순간도 있었다.
내 마음의 한 부분을 내어주는 게 낯설고도 어려웠다. 분에 넘치듯 많이 내어주면 이내 상처로 돌아왔다. 내 맘속에 너가 있듯 네 맘속에도 나를 위한 공간이 있겠지 싶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한동안 마음을 쓰는 행위는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게 미련한 짓임을 깨닫는 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내가 모질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마음을 쓴다는 건 내가 쓰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안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문을 닫는다고 꽁꽁 싸매도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내 맘에 한 편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음을 쓰는 건 대가를 주고받는 행위도 가치를 교환하는 행위도 아니었다. 무척이나 비효율적이고 일방적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것. 그게 마음을 쓴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마음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행위도, 왜 너는 나만큼 마음을 쓰지 않느냐는 투정도 어쩌면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마음을 쓰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하다 재미난 것을 하나 발견했다.
글의 처음에 이야기했던 spend의 의미들. 돈과 시간과 에너지와 노력 그리고 시간을 쓴다는 표현 모두, '쓰다'를 '쏟다'라고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마음이 쓰인다는 것도 어쩌면 내가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만 마음을 줘야지'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이유도, 마음은 누군가에게 세밀하게 부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도 어쩔 수 없이 쏟아버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늘 무엇에 마음을 썼고 누구에게 그렇게 마음이 쓰였나.
내 맘 속의 공간을 미련하게 밀어내려고 했다면 이제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여보자. 그 사람을 위한 내 마음속 작은방을 만들어 보자. 그리고 아까워하지 말고 내 마음을 쏟아보자.
어쩌면 마음이란 그렇게 '쓰라'고 있는 건지도 모르니까.
illustration by Anna Par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