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영 Jul 07. 2019

'악의가 없다'고 해서 모두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 이란 이름으로 유년시절을 거쳐 '성인'이란 신분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란 타이틀로 직장생활을 이어오다 보면, 꽤나 다양한 유형의 인간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눈빛만 봐도 내 기분을 모두 파악해주는 베프를 만나 든든한 아군을 얻기도 하는 반면, 당장이라도 나무에 매달아버리고 싶은 종족을 만나기도 한다. 

놀라운 사실은 이제 좀 사람 대하는데 요령이 생겼나 싶을 때면 여지 없이 상처받는 일이 생기곤 한다는 점이다.  


직장에서는 생각보다 사과를 할 일도 받을 일도 많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보니 동명이인에게 메일을 잘못 보내는 사소한 일부터 시작해 이불 안에서 오버헤드킥을 해도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는 실수를 할 때도 있다. 어찌 되었건 최대한 나의 잘못은 신속 정확하게 그리고 진심을 담아 사과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반대로 회사에서 누군가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할 때도 가능한 동료애를 발휘하려고 애쓴다. 타인의 잘못을 너그러이 받아줄 그릇은 아니기에 언젠가 나도 이 사람에게 실수를 했던 적이 있었겠지 혹은 앞으로 내가 사과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쿨하게 넘겨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종종 애매한 경우를 마주하게 된다. 바로 누군가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걸 보게 될 때다. 물론 그 대상이 내가 될 때의 데미지는 잘 익은 감자에 젓가락 꽂히듯 깊고 뜨겁게 다가온다. 



"아 그 사람 원래 말을 그렇게 해. 근데 악의는 없어. 정말 그냥 모르고 하는 얘기야."



그렇다. 우리는 제 3자가 건넨 이 한마디로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나쁜 의도 없이 무심코 한 말에 부득부득 우겨 사과를 받아내자니 참 없어 보이고, 그렇다고 아무일 없다는 듯 웃으며 넘기기에는 밑바닥 어딘가에 자리한 내 자존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대체 '악의는 없다' 이 말이 갖는 면죄부는 어디까지일까. 



'악의는 없다' 이 말 앞에서 부득부득 우겨 사과를 받아내기는 참 힘든 일이다.



내 인생을 통틀어 만난 최악의 사람 중 하나는 예전 팀의 조직장이었다. 무엇보다 힘든 건 그의 무례함이었는데 같은 팀원인 우리야 둘째치고라도 협업하는 파트너들에게 범하는 실례는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주위에서 우리에게 하는 위로는 '저 사람이 악의는 없어. 그러려니 해.'라는 말 뿐이었다. 그 때 실감했다. 그 말이 주는 무책임함과 나약함이 상대방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조금 과장하자면, 말 실수는 교통사고와도 같다. 보복운전을 제외하고서는 '지금 내 앞에 가는 저 차를 박아서 부숴버려야지'라는 마음으로 사고를 내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부주의해서 혹은 조금 더 쉽게 빨리가려는 욕심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가해자도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 셈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상대방과의 대화는 운전하듯 해야한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너무 안전거리 없이 바짝 붙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조심해야 한다.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은 채 대화에 함부로 끼어들기를 해서도 안되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 '말의 사각지대'까지도 늘 주의해야 한다. 게다가 타인과의 대화는 신호등 없는 사거리와 같아서 양보 없이 내 갈길만 갔다간 상대와 부딪히기 십상이다. 그 때가서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 이미 나는 그런 위험을 내포한 채로 운전대를 잡았으니 말이다. 


그럼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과연 '악의가 없다'는 말은 어디까지 정상참작(?)이 될까. 개인적으로는 변명으로도 위로로도 하지말아야 할 말이 바로 '악의가 없다' 아닐까 싶다. 


첫째, '악의가 없다'는 말은 상대방의 상처를 그냥 덮게 만든다

아직 나는 치료가 필요한데 계속 아프다고 하면 유난떠는 사람이 될까봐 그냥 웃으며 괜찮다고 넘기게 된다. 이는 상황을 해결하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시킨다. 결코 좋은 처방전이 될 수 없다. 


둘째, 비슷한 실수를 계속 저지르게 만든다. 

'악의가 없다'는 것이 면죄부가 되다보면 유사한 피해자가 속출한다. 가끔은 이미 피해를 겪은 사람이 이 말로 다른 피해자를 위로하는 어이없는 광경도 목격하게 된다. 무례한 사람에게 '악의가 없다'는 변명은 자기 스스로를 멋지게 합리화하는 도구다. 그러니 함부로 쥐어주면 안된다. 


셋째,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애매하게 만든다. 

누군가 나는 그저 악의 없이 한 말이자 행동이었다고 하면 상대방은 피해를 입고도 고민에 빠진다. 마치 내가 이해심이 부족해서 나쁜 의도가 없는 사람을 괜히 이상한 쪽으로 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스스로 자문하게 만든다. 이런 과정이 거듭되다 보면 피해자는 소심해지고 가해자는 당당해지는 참으로 놀라운 현상이 벌어진다. 나는 이게 가장 무섭다. 



'악의가 없다'는 말은 상대방의 상처를 그냥 덮게 만든다.




이제 반문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럼 정말 '악의'가 없었는데도 마치 큰 잘못이라도 만들어 사과를 해야하는 것이냐고 말이다. 당연히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악의가 없다'는 말과 '의도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자는 정상참작의 근거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전자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악한 의도가 없다'는 것이 곧 선한 행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른 바 악의(나쁜 마음)를 가질 정도의 사람은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그러니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고 사과의 포문을 여는 것은 이미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나 그렇게 나쁜 놈 아니다'를 깔고 가는 것과 다름 없다. 사과나 위로의 기술로는 최악인 셈이다. 


고백하자면 나도 한 때 변명의 도구로 이 말을 꽤 자주 사용했던 것 같다. 아마도 '나는 선한 의도로 한 일인데 결과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어쩌죠?' 라는 늬앙스를 전달하고 싶었나 보다. 더 정확히는 나의 무고함을 빨리 보여주고 얼른 사과를 마무리 하고픈 마음이 더 컸다고 해야하겠다. 다시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사건의 경중을 떠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용서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서 잘못을 고백하는 방식은 단언컨데 좋지 않다. 


글을 시작하며 말했지만 생각보다 우리는 사과를 할 일도 받을 일도 많다. 그 때마다 한 번쯤은 곱씹어 봤으면 하는 게 작은 바람이다. 오늘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며 상대의 상처를 헤아리기보다 나의 죄없음을 먼저 인정받고 싶어하지는 않았는지. 혹은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은 누군가를 위로하며 어쩔 수 없이 삼켜야 하는 알약같은 말들을 사용하지는 않았는지. 

'세상에 나쁜 놈이 따로있나. 짜증나게 자꾸 내 머릿 속에 맴돌면 그게 나쁜놈이지' 라는 어느 영화 속 대사가 아주 없는 말은 아니지 싶다. 적어도 우리 그런 '놈'은 되지 말자. 그럴 의도가 있었건 없었건 간에 말이다.    

 

    




illustration by Anna Parin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