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이란 책을 보면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이 여행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언급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는 왜 우리가 실제 여행지에 가서 보는 풍경은 엽서 속에서 보던 그것과 다른지, 왜 남들이 극찬하는 유명 관광지가 나에겐 별다른 감흥 없이 다가오는지에 대해 한 챕터를 할애해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사람이 가지는 '기대 심리'와 '이국적인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바탕으로 그 이유를 하나씩 짚어가는데 그 과정이 알랭 드 보통의 명성만큼이나 합리적이고도 치밀하다. 그래서인지「여행의 기술」을 읽고 나면 어디론가 여행을 가고 싶어진다기 보다 '나는 왜 떠나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과 먼저 맞닥뜨리게 된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에 나와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자 여행이 주는 의미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회사원에게는 방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방학이 없는 회사원의 삶'에 대해 누군가 자세히 좀 설명해줬더라면 아마 그 때 더 알차게 놀 수 있었을 테다.
여튼 이제 자의에 의한 휴식을 제외하고는 방학이란 없으므로 내 인생에서 여행은 유일한 출구임이 확실해졌다.
사실 여행에 대한 가장 큰 욕망은 군대시절에 경험했다.
전역만 하면 다음날부터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모은 다음 3개월 뒤 지구 반대편으로 훌쩍 떠나는 상상을 매일 같이 하곤했다. 그래서 휴가 복귀를 할 때면 서점에 들러 여행 가이드북을 한 권씩 사오기도 했다. 주말에 내무실 침상에 누워 방콕 카오산 로드에 관한 내용을 읽고서는 그 자유로운 분위기에 한 껏 취해 며칠동안 설렜던 적도 있었다.
군대 때 만큼은 아니었지만 취준생 시절에도 여행에 대한 바람은 간절했다.
내 힘으로 매달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생활이 시작된다면 꼭 1년에 한 두번은 해외여행을 가리라 마음 먹었다. 아니면 주중에는 프로처럼 일하고 주말에는 근사한 SUV를 타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던 그 때는 이 긴 터널만 벗어나면 그 다음은 내가 키를 잡고 조종할 수 있는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 확신했고, 그 인생의 우선순위 목록에 언제나 여행이 있었다.
그러고보면 여행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현재를 버티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지금 이 곳의 불온전함이 온 몸으로 전해져 올 때, 바라는 이상과 냉혹한 현실의 괴리감이 차가운 물을 피부에 붓듯 쨍하게 느껴질 때 특히 그랬다.
그래서 햇살과 공기 - 온도와 바람 - 언어와 지명 - 냄새와 촉감 - 입으로 가져가는 음식과 자려고 눈을 감기전 마주하는 천장의 벽지무늬까지 모든 것이 낯선 환경으로의 이동을 바라게 되었다. 알랭드보통이 경고한 그 '여행에 대한 기대'의 위험함을 알면서도 나는 차곡차곡 이국적인 것의 환상과 로망을 쌓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 초년생 땐 어딜 가든 여행지에서 보내는 1분 1초가 아까웠다.
한 군데라도 더 보고 싶었고 혹시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곳의 정취를 까먹지는 않을까 싶어 사진으로, 메모로 남겼다. 언제 또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 잘 있으라는 어린아이같은 인사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보내며 여행의 마지막 날을 마무리 하는 것이 의례였다.
시간이 지난 뒤에는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빽빽히 세워둔 여행 스케줄을 꼭 따르지 않아도 무방했다. 인터넷에서 극찬한 줄 서는 맛집이 아니더라도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는 느낌 좋은 식당도 괜찮았다. 혼자서 멍하니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것도, 낯선 타국인인 나에게 상냥히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렇게 나는 어느덧 여행을 '하는' 방법을 벗어나 여행을 '즐기는' 방법을 알아가는 단계에 이르렀다.
누구나 그렇듯이 여행지에서 돌아오면 며칠간의 여운과 감흥을 거쳐 다시 일상에 젖어들게 된다. 그 시간이 꽤나 고통스럽긴 하지만 그게 현실이므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냉정하게 이야기 하자면 우리가 며칠 전까지 머물던 그 도시는 그 모습 그대로 흘러가고 있고 당신의 눈에 담았던 아름다운 야경은 오늘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여행은 우리의 기억에서만 머물고 있고 또 우리의 기억을 통해서만 변형되어 간다.
살을 조금 붙이자면, 여행은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 속에만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주일, 열흘, 길게는 한달 남짓 머물던 그 시간을 우리는 몇 년, 몇 십년을 곱씹으며 살아간다.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동경 역시 상상 속에서 마주하는 시간이 실제보다 더 길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누군가와의 아주 짧은 만남을 위해 기약 없는 긴 시간을 준비하고 또 지워지지 않는 미련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투자 대비 결과를 생각한다면 꽤나 손해보는 일이지만 어디 세상 사는 일이 우리의 맘대로 되는 것이 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떠난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상상하고 그리워하며 여행을 배운다. 현재의 불안함 속에서 위태로워 하면서도 그 곳은 나에게 안정감을 줄 거라는 희망을 품는다. 사람사는 곳이 다 똑같음에도 내가 서 있던 장소, 내가 거닐던 시간은 온전히 나를 위해 기다려줄 것이라고 믿는다.
지나간 것 속에서 헤매고 다가올 것들에 장밋빛 물을 들이는 심리.
여행은 사람의 그것과 꼭 닮아 있기에 우리는 또 떠난다.
그게 여행이고 그게 삶이다.
어쩌면 알랭 드 보통이 우리에게 해준 이야기도 '경고'가 아닌 '본성'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원어 제목인 「The Art of Travel」을「여행의 기술」이라 번역하기는 했지만 그가 담고 싶었던 늬앙스는 분명 '기술' 이상의 것이었을 테다.
여행은 현재와 과거, 미래를 잇는 종합 예술(art)이고, 이를 통해 마주하게 되는 나라는 사람과의 시간은 그 어떤 인문학(art) 서적보다 심오하니 말이다.
illustration by Anna Par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