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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SCENE
by HUSTLE Apr 01. 2018

젊은 꼰대가 더 노답인 이유

'꼰대는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능력의 문제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의 저자인 정문정 작가의 말이다. 몇번을 곱씹어 봐도 맞는 말이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시간을 더듬어 보면 나이든 꼰대도 많았지만 또래인 꼰대도 적지 않았다. 특유의 허세와 과시가 불편했고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몇 배 더 힘들었다. 꼰대는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한다는 게 불멸의 진리이기에 '젋은 꼰대'는 어린 나이에 찾아온 불치병 만큼이나 안타깝다. 

왜 그들은 (혹은 우리는) 젊은 나이에도 꼰대가 되어갈까? 



대학생활까지는 주로 나이와 학년이 꼰대짓의 기준이었다. 

OT에서 늙다리 복학생 형을 그리도 욕하던 친구들은 어느덧 그리스 철학자의 반열에 올라 후배들의 인생을 참견하기 시작했다. 인생을 코스로 비유하면 이제 에피타이저 정도 맛보았을 나이인데 만물의 이치를 두 번 정도 깨우친 느낌이었다. 그들은 2-3 학번 차이의 후배가 생기는 대학생활 중반 쯤 허세의 정점을 찍다가 취업 시즌이 다가와서 약간의 겸손을 유지했었던 것 같다. '선배! 오늘 술 한잔 해요'라는 말에 손사레를 치며 토익책과 함께 도서관으로 향하던 모 선배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안타까운 건 그 시간을 지나 취업에 성공하고나서였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더 강해진 사이어인 마냥 슈퍼 꼰대짓이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그와는 몇 년에 한 번씩 서로 겹치는 지인의 결혼식에서나 보는 사이가 되었다.  


본격적인 꼰대의 향연은 회사에서부터 시작된다. 

회사에는 진한 농도의 원액 100% 꼰대부터 본인은 꼰대가 아니라며 갖은 쿨한 척으로 위장한 꼰대도 있다. 이 모두를 흔히 '꼰대'라고 칭하지만 사실 꼰대는 환경적, 생물학적, 관계중심적 요인에 의한 체계화된 분류가 필요한 종족이다. 회사생활 몇 년을 하다보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만으로도 꼰대 유전자 지도를 만들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다 함께 회사 생활을 시작한 또래들이 점점 발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가 온다. 그렇다. '젊은 꼰대'의 출현이다. 




'젋은 꼰대'는 어린 나이에 찾아온 불치병 만큼이나 안타깝다.




젊은 꼰대는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또래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이 강하다.       

자신은 그 험한 취업 경쟁에서 살아남았고 요 몇 년간 나름 앞가림도 잘해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취업하지 못한 친구나 동기가 세상 답답하게 느껴지고, 꿈을 찾으러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 후배의 SNS를 보며 '관종'이라 욕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월반(越班)이나 조기졸업에 성공한 인생 우등생이라고 생각한다. 꼰대란 모름지기 남들보다 자신이 우월한 이유를 어떻게서든 찾아내서 이를 계급화하는 종족이다. 함께 시작한 출발선에서 점차 속도차이가 나기 시작하는 이 무렵을 꼰대들이 놓칠리는 만무하다. 


둘째, 나이든 꼰대를 극도로 경멸한다. 

누구나 꼰대를 싫어하지만 꼰대가 꼰대를 더 싫어하는 법이다. 남자들은 흔히 이 경험을 군대에서 하게 되는데, 악던 선임을 죽도록 미워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 그보다 더한 괴롭힘을 일삼는 광경을 목격한다. '나는 절대 저러지 않겠다.'고 반(反)꼰대 투사가 될 듯이 얘기하는 사람을 특히 조심해야하는 이유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꼰대 성향이 있어 앞날이 걱정된다면 남을 욕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편이 현명하다. 회식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당신의 팀장이나, 주말에 뭐하냐며 후배에게 카톡을 보내는 당신이나, 그들에겐 모두가 꼰대일 수 있다. 그러니 매사에 조심하자.  


셋째, 자신이 하는 모든 꼰대짓에 '진심'을 담는다.    

사실 이게 제일 놀랍고 소름끼친다. 꼰대는 정말 '본인이 맞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보통 나이든 꼰대들은 '요즘 것들이란..' 말 등으로 나이나 계급, 성별, 지역에 대한 차별로 꼰대짓을 시작하곤 하는데, 젊은 꼰대들은 자신이 믿는 진실에 기반해 꼰대짓을 한다. 그들 앞에선 뉴스에 나온 정치 이슈 하나 얘기하기도 무섭고 내 생각을 말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사라진다. 꼰대는 상대방의 침묵을 유도하는 묘한 재주가 있나보다. 




꼰대는 정말 '본인이 맞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십대 후반을 지나 서른의 문턱을 넘어서면 가끔 어쩔 수 없이 봐야하는 친구들이 생긴다. 

싫은 티를 내자니 내가 구차해지는 것 같고 그렇다고 '어쨌든 친구 아이가!'를 외치며 함께 섞이기에는 심히 불편한 사람들이다. 일년에 많아야 한 두번 보는 사이고 심지어 일대일로 만나는 것도 아니지만 조금만 같이 대화를 하다보면 씁쓸한 꼰대의 향이 난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태생적으로 내재된 본인의 성향일 수도 있고 각박하고 치열해진 사회 분위기 탓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그 다름을 문제시 하는 태도'다. 나아가 꼰대는 이 '문제 아닌 문제'를 바로 잡아주려고 도 넘은 참견을 일삼는다. 글의 서두에서 정문정 작가가 이야기한 공감능력의 부재도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고 난 생각한다.   


사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란게 쉽게 길러지진 않는다. 연습과 노력으로 어느정도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나 역시 하루에도 싫은 사람을 수십명씩 만난다. 그 중에 몇몇은 가족보다 더 자주 보고 말을 섞어야 하며, 대체 저 인간의 뇌는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마냥 이해하고 넘기기에는 나에게 허락된 감정 노동 수준이 초과된다. 간혹 인간관계를 다룬 책들이 마법같은 방법들을 제시하지만 나에겐 종교서적 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내가 행할 수 있는 레벨의 방법들이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피한다. 입을 다문다. 그리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이게 좋은 방법이냐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 다른 사람이기에 그들을 지적하고 나서는 것 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꼰대로 가는 급행열차에 오르는 행동이다. 

그러니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타인의 이상함은 속으로만 욕하는 게 좋다. 답답하면 친한 친구를 만나 그에 대한 뒷담화를 열심히 늘어놓는 것이 낫다. (다른 얘기지만 적당한 뒷담화는 정신건강에 참 좋다.)

더불어 그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도, 참견하지도 마라. 

애정이라는 이름 하에 행해지는 대다수의 것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서는 더 그렇다. 당신이 매일 보는 직장 후배를 동생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우리는 그들을 모른다. 인간 관계란 축적된 시간의 양이 많다고 마냥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다.  

 



애정이라는 이름 하에 행해지는 대다수의 것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서는 더 그렇다.




세대간의 구분이 훨씬 더 촘촘하게 나눠지는 요즘이다. 계층 갈등을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 들 수도 있지만 그게 현실이다. 이 간극을 좁히는 방법은 부장님이 아이돌 음악을 들으며 신입사원에게 친한척 하는 것도, 팀 막내가 먼저 용기내어 등산 모임을 추진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냥 그렇게 두면 된다. 

공감이란 '내가 만약 저 사람이라면?'이라는 물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저렇구나'라는 인정에서부터 비롯된다. 이제 스스로의 공감 능력을 객관적인 눈으로 진단해보자. 당신에게 개선이 필요하다면 하루 빨리 시작하는 것이 낫다. 어차피 늙어서 될 꼰대라면 하루라도 미루자. 그게 후배들을 위하는 길이다.   






illustration by Anna Par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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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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