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열문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영 Sep 13. 2023

'애매하다'는 말은 기획자에게 치명적인 평가니까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41

01. 

기획을 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피드백을 받게 됩니다. 긍정적인 피드백만을 받으면 세상 좋겠지만 사실 피드백에는 부정적인 것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죠. 기획자의 역할 자체가 다양한 의견을 모으고,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개선해야 하는 부분에 대한 피드백들이 우선되는 것은 당연하니까요.  


02. 

그럼 우리는 어떤 피드백을 받을 때 가장 마음 아프거나(?) 혼란스러울까요? 

개인차가 있겠지만 저는 '음.. 좀 애매한데요..?'라는 피드백을 받을 때가 가장 고민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부정의 강도가 엄청 높은 피드백보다 훨 나아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 완전히 방향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반응을 듣는 것은 오히려 앞으로 갈 길이 명확해진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섰으니 이제 이 길을 빠져나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함이 우리의 역할이 되는 거니까요.  


03. 

하지만 '애매하다'는 피드백은 듣는 사람뿐 아니라 하는 사람도 곤란하기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단점을 찾자니 엄청 크리티컬 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마음에 쏙 들 정도로 박수를 보낼 수는 없는 상황이니 말이죠.  

그래서 대부분 이런 피드백에 대해 '애매하다고만 말하면 어쩌나..? 답을 줘야지 답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는 오늘 이 말을 조금 다르게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04. 

먼저 '애매하다'는 말과 비슷한 느낌의 말을 찾는다면 뭐가 있을까요? 어쩌면 '이도 저도 아니다'같은 말이 될 수도 있고, '특색이 없다', '밋밋하다', '딱히 맘에 드는 부분이 없다' 혹은 '어딘지 모르게 찝찝함(?)이 있다'로도 표현이 가능하겠죠.  

아마 이들 단어의 공통점은 어딘가 뾰족하고 날카롭게 다가오는 결정적인 포인트가 부족하다거나 반대로 다 좋은데 우려되는 포인트 하나를 상쇄할 제대로 된 방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같은 것일 수 있겠네요.  


05.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애매하다'는 단어에 이 의미 하나를 추가하고 싶습니다. 바로 '과감히 포기하지 못한다'가 그것이죠.  

우리가 가장 많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뭔가를 더 추가하거나 갈고닦지 못해서 애매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음식으로 치면 좀 밍밍한 거 같아 소금도 넣어보고 간장도 넣어보고 심지어 라면스프도 탈탈 털어봤는데 국물만 더 탁해질 뿐 여전히 그 '애매한 맛'에 머무르고 있는 형국인 것이죠.  


06. 

하지만 애매하다고 판단되는 것들 중에는 높은 확률로 '두 가지 가치가 부딪히고 있는 상황'인 것들이 있습니다. 즉, A와 B는 서로 공존하기 어려운 요소인데 어떻게든 이 둘을 엮어보고자 어느 하나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물론 두 가지 다 100%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살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겠지만 기획을 하는 입장에서는 늘 선택의 문제와 마주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라는 것은 뭔가를 추가하는 것보다는 어느 하나를 빼거나 포기하는 것인 경우가 훨씬 많고요.  


07. 

따라서 저는 '애매하다'는 피드백 앞에서는 '내가 무엇에 욕심을 부리고 있는지'를 한 번 냉정히 파악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선 기획물 안에 담긴 요소를 하나하나 뜯어본 다음, 서로 방해하고 있는 것들이 보이거나 아무리 각자의 가치를 존중해 주려고 해도 도저히 양립이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다면 어느 한 가지의 밀도를 좀 낮춰주는 지혜도 필요한 법이니까요.  


08. 

더불어 타인에게 피드백을 해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이 두 개를 엮어서 풀어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어려운 걸 해내셨내요'라는 감탄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죠. 그러나 이 역시 실제로 들여다보면 이 두 가지가 50:50의 비율로 자리하고 있는 케이스는 정말 드뭅니다. 무엇 하나를 먼저 어필해놓고 다른 것 하나를 적절한 타이밍에 내놓는 방식을 취하는 전략이 훨씬 많거든요. 때문에 조화를 잘 이룬 것들을 향해서도 '이 둘 중에서는 무엇에 더 주안점을 두셨나요?'라고 그 포인트를 역으로 질문하는 것도 좋은 피드백이라고 생각합니다. 


09. 

어린 시절 한 번쯤은 보셨을 이솝우화에는 구슬을 한움큼 쥔 채로 병에서 팔을 빼지 못하는 동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 그때의 교훈은 '욕심을 부리지 말자' 였을 것 같은데요, 저는 이 단순하고도 오래된 교훈을 이렇게 바꾸면 더 임팩트가 크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그렇게 뭐 하나 놓지 못하다간 진짜 애매해진다'라고 말이죠.  


10. 

그래서 저는 기획자가 진짜 반성해야 할 피드백이 바로 '애매하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쇄되는 요소를 제대로 파악해 보지 못한 불찰과 공존과 양립 모두 불가능한 두 대상을 손에 꽉 쥐고 병에서 팔을 빼지 못하는 그 우매함이 동시에 지적되는 포인트니까요, 적어도 이 말을 들을 때면 기획물과 함께 나의 애티튜드도 돌아봐야 하는 건 아닐까 싶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재미로 하는 일에도 '체계'가 있으면 좋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