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퇴근만 하면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온 그와 집 근처의 공원으로 산책하러 가는 건설적인 만남이 계속됐다.
'그래, 만나면서 이것저것 물으면서 알아가는 거지.'
나이가 한 살 차이밖에 나질 않아서 나는 이루지 못한 기업체에 다니는 그 사람의 학창시절이며 많이 궁금했다. 공원 앞 신호등 근처까지 빠르게 걸었을 즈음 그가 물었다.
"목돈 있어요?"
"목돈이요? 그게 뭔데요?"
"그거 있잖아요. 뭉치돈. 이렇게 모아둔 돈이요. 백이면 백, 오백이면 오백."
"아~왜요?
"아니 목돈이 있으면 투자하기 좋거든요. 유동할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투자를 할 수 있거든요."
"아 예~."
그리고 이런저런 얘기하다 금방 다른 얘기로 넘어갔다. 의아는 했지만, 뭐 나이도 비슷하고 서로 사회 초년생이나 마찬가지니까 재테크에 관심이 있어서 동생처럼 물어봤겠지. 뭐든지 이해가 갔다.
그리고 공원 중간 즈음에 왔을 땐
"어... 아니 오빠라고 해야 빨리 친해지는데. 오빠라고 불러봐요."
"네?"
"오빠라고 해야 친해지죠."
"네. 오빠."
아. 지금 보니 넘 빨리 친해졌나? 여하튼 돈얘기 후에 바로 오빠라고 친해지자고 말했던 거니 그에겐 다 계획이 있었나 보다.
그땐 아무리 스토리를 되새겨봐도 뭐가 잘 못된 건지 짐작이 잘 가지 않았다. 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진실되지 않은 모습을 숨기고 있다면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 나는 내가 가진 마음으로 상대를 보는 눈만 있었다. 뭐 지금도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그 후에 세상을 더 빨리 깊이 통찰해 보겠다며 10년간 모은 돈을 탈탈 털어 대학원은 갔을 때도 너무 힘겨웠다. 모든 글을 내 식으로 읽게 돼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갖추는데 많이 헤매곤 했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한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랑이란 게 하다 보면 묘한 세계에 빠지는 거잖아요. 현실과는 다른."
뭐 그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게 무슨 말일까? 했는데. 왜냐면 나는 한 번도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처음부터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내 친구에게 둘만의 관계에서 힘든 얘기를 하면, "야, 네가 더 좋아한 것 같다. 끝."이라고 말했다. "뭐라고? 난 그런 사람 세상 싫다니까."
여하튼 우리는 만난 지 2개월 만에 빠르게 결정하고 3개월 뒤 결혼식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어느 마트에서
"아 나 요리 못하는데 어쩌지?"
"뭐 사 먹으면 되지."
"나 김치 담가본 적 없는데 어쩌지?"
"김치도 사 먹으면 되지, 숟가락만 가져오면 돼."
"아. 정말?"
"그래."
참 "그래."라는 너무도 쉬운 쿨한 반응들이 그가 너무도 세련되고 멋있어 보였는데. 만난 지 이틀 만에 목돈 있냐고 진중하게 물어봤던 그의 모습을 잊고 있었다. 지금 16년 전 그날을 다시 해석해 보면 그가 말한 목돈은 당시 최소 3,000만 원이었다. 내가 늦게까지 공부만 하면서 너무도 소탈해서 초등 5학년때 아빠 앞에서 주판을 치면서 산수를 잘하면 아빠가 500원씩 주먹만큼 쥐어주던 그 기억이 너무 강했나 보다. 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눈엔 골드미스가 아닌 그가 결혼 후 그가 나에게 그렇게 짓어대던 '똥차, 막차'로 인식돼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