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벌어서 네가 쓰라고. 부러우면 시험 봐서 대기업 들가든가. 대기업 가면 여행 보내줘, 돈 줘, 교육시켜 줘, 밥 줘. 다 해주는데. 능력 없는 것들이 불만만 많아가지고."
"너 같은 며느리가 어딨냐? 어르신이 시골에 사셔서 벨을 안 누르실 수도 있지. 벨이 뭔지 모른다."
"너는 돈이 없냐? 궁궐 같은 집에 살게 해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고마운지 알아야지. 너 때문에 우리 아버지 시골에 분가하신 건데. 너 같은 며느리가 어딨 냐?"
"이럴 줄 알았으면, 베트남 여자랑 결혼하는 건데. 너같이 수준 낮은 것은 내 주변이 없는데 말이야. 본 적이 없단 말이야."
"히히 잘 골랐다. 역시 돈이면 다 되는구먼, 100만 원이면 결혼도 하네."
"수준도 낮은 것들이 지라서 뭐라고. 너희 아빠 말하시는 것만 봐도 알지 수준이 낮잖아. 너희 집엔 공무원도 없잖아."
라는 끊임없는 말들. 저런 대화는 대결할 틈이 없다. 싸우자는 건지, 아니 왜? 결혼은 왜 했어? 직원 찾아? 아니 회사를 차려서 직원을 구하지 그래? 어떻게 결혼한 사람 앞에서 인간의 온갖 추악한 말을 퍼부울까? 짐승인가? 우리가 파혼한 후에 재결합을 해서 화가 제대로 났나?
친언니는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장님 삼 년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했다. 아무리 상대가 파혼을 종용했더라도 내탓으로 할 거라면서 절대 반응하지 말고 흘러보내라고 했다. 그래, 저 남자는 참 철없고 어리다. 그런데 어떻게 부인한테 그래?라는 의문은 해결하지 못했다. (친구는 자신의 남편이 "참 못났다 못났어."라고 했다고 내게 전했다. 나름 그 말이 내게 큰 위안이 됐다. 나를 격려하고 지지하며, 응원하는 말로 들려 내편인 것 같았다. 그땐 우리 부모님은 늘 네가 그러려니 해라. 장남이라 돈 아끼려고 한 거라며 이해하라고 했다.)
그는 경제권에 대해서 투자에 대한 상식도 없는 사람에게 돈을 다 줄 수 없다면서 부부는 1대 1의 부담을 똑같이 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와 3개월간 실랑이를 벌였다. 누구는 이렇게 한다더라 누구는 저렇게 한다더라 하면서 내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주식을 알아? 펀드는 아냐? 요즘에 누가 저축하냐. 저리 꺼져. 수준도 안 되는 것이 네가 벌어 네가 쓰라고라는 말들은 은근히 설득이 되긴 했다. 물론 그의 언행은 참을 수 없었지만. 일부분이 맞았으니 더 이상 내 주장이 먹히질 않았다.
다 물어봤는데, 소득이 많은 사람이 투자를 하고 소득이 적은 사람이 100% 쓰는게 맞대. 안 그래? 맞잖아. 네가 적게 버니 니 돈을 다 쓰는게 맞아.
뭐? 그게 말이 돼? 그럼 내 명의로 보험이랑 저축 넣어줘.
뭐? 넌 여기 집 하는데 돈 한 푼 안댔잖아. 내가 왜 다 해야 하지?
결혼했으니까 같이 해야지. 남자가 돈을 더 버니까 집할 수 있잖아. 그리고 난 돈이 초기에 없다고 다 말했는데, 왜 이제서 그래? 그럼 나하고 왜 결혼했는데?
야, 네가 나이가 많은데. 그 돈도 없을지 내가 어떻게 알았냐? 부자 될지 알았지. 너같이 수준 낮은 것을 내가 본 적이 없다.
뭐?
청소 안 하면 50만원 안 줘.
이런 대화가 계속되다 결국은 생활비 50만 원만 주는 게 적당하다며 그것도 너무 많다면서 억울해하면서 그 이후는 생활비는 그에게 무기로 이용됐다. 자신이 어떤 필요에 의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떻다는 식으로, 돈 50만 원 안 준다며 은행의 공인인증서를 교체하거나 계좌의 비번을 예고 없이 바꾸면서그의 불규칙적인 행동으로 내 삶이 점점 불안해졌다. 뭘까 강한 흔들림? 정의 내리기 힘들었다. 심지어
"시골에 청소해야 하는데, 가서 청소 같이 하자."
"뭐? 느닷없이? 임신 5개월이라 배 나와서 청소를 어떻게 해."
"나랑 같이 하면 되지 시골 언제 한 번 하려고 했는데. 오늘 해야겠어."
"자기가 해 그럼, 자기 집이잖아."
"왜 나 혼자 해. 너도 같이 해야지.
"임신했는데 어떻게 해? 굳이 같이 해야 돼? 자기 집이니 그냥 하면 되지."
"그러기냐. 왜 나 혼자 해야 하는데? 그런 식이지? 그럼 너 50만 원 안 줘."
"뭐라고? 말이 돼?
"그럼 청소 같이 하든가."
헐, 왜 말을 저렇게밖에 하질 못할까? 시골에 갔더니 설거지통은 시궁창이었다. 도로 하수구 맨홀뚜껑을 열었을 때 찐한 검은 액체가 설거지 음식통에 타르처럼 묻어서 씻기지도 않았다. 이 상태로 어떻게 물을 사용했을까? 그리고 그릇거치대 모서리에는 1센티 거미와 그 거미가 지은 집, 거미줄이 두껍게 지어있었다. 응? 음식은 안 드시나 했는데, 사용하는 그릇들이었다. 그런데 왜 거미줄은 치우지 않고 사용하실까? 이상했다. 남편도 보고도 치우지 않았다. 그 옆에는 전자레인지가 있었는데, 음식물이 다 튄 지 오래인 듯 찐득하면서 딱딱하게 굳은 음식 잔해와 전자레인지 3면 그리고 뚜껑 안쪽 문까지 오래된 음식 파편들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그리고 식탁옆에는 쓰레기통이 뚜껑 없이 있어서 부엌 안은 음식쓰레기 냄새 마당은 오래된 쇠똥냄새가 버무려져 온갖 썩고 오래된 냄새들이 뒤범범 내 코와 온몸을 감싸니 임신 5개월 된 나는 입덧등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구역질이 자극되어 참느라 심정이 너무도 불쾌했다. 빨리 나가고 싶어 남편에게 화장실 청소 빨리하라고 재촉이고 난 설거지 쪽을 담당하다 남편이 나 보고도 화장실 청소를 조금 하라고 했다. 너무 서러웠다. 그가 힘들어하는 것이 뭔지 알겠지만 왜 나를 고려하지 않을까? 남편이 더 많은 일을 했지만 나도 30퍼센트는 거들어서 배가 많이 당겼다. 시골이고 오랜 떼를 벗겨내야 하는 일이라 힘을 줘야 했고, 몸을 굽혀야했다. 그렇게 1시간 반에서 2시간을 일을 하고 집에 가면 5시가 다 되어서 주말은 통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렇게 힘들게 끌려 다녔지만 그는 다른 곳은 절대 가려하지 않았기에 5년을 주구장창 시골만 다녔다. 난 돈 때문에 시골에 따라간 것이 아니다. 난 이제 막 결혼했고 아이가 있고 남편하고 늘 함께 하고 싶었는데 시아버지가 매주 우리 집에 오시기 때문에 이때가 아니면 같이 있는 때가 없었다. 평소에는 11시에 일이 끝나서 집에 가면 그는 잠을 자고 있었고. 어느 날 내가 오자마다 구토를 하자. 그는 왜 저래? 하며 등몇번 쳐주드니 묻지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잤다. 내가 원치 않은 구도가 그 신혼집에서 3년이 갔다. 그리고 토요일엔 그는 친구 찾아 당구장을 주구장창 다녔고, 일요일엔 시아버지 교회 데려다 드린다면서 교회를 다녀오고 점심 때나 내가 차려놓은 음식을 먹고 2-3시경에 도련님, 나와 남편 그리고 시아버지를 시골에 시골에 데려다 드리면서 일본 천황 찬양을 달리는 차 안에서 들어야 했다. 그들은 너무도 괴이했다. 차 안에서 온갖 구역질 나는 시골 냄새, 쉰 냄새, 땀 냄새, 구린 냄새 등 뒤섞인 냄새를 참아내야 했다. 냄새와 역사 왜곡의 썩은 정신까지 들으니 미치기 일보 직전인데 남편은 웃어대며 꿍짝꿍짝 시아버지랑 잘도 얘기한다. 말씀은 얼마나 허풍스러운지 늘 "며늘아집은 양반이제, 우리랑 대지도 못하제."라는 시대에 맞지 않는 말씀도 매주 하셔서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늘 같이 오시는 도련님 몰골은 SOS에서 나 볼법한 모습이었는데 남편은 한 번도 동생을 생각하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할 듯 말듯한 말로 비껴가면서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다. 어느 날 16개월 된 첫 애랑 밥을 먹는데, 도련님이 밥을 드시다, 앞니 두 개가 뽕 밥그릇에 빠지는 걸 당황스럽게 봤다. 못 본 척 아무도 반응을 안 하길래, 차마 놀랐지만 난 반응을 숨겨야 할 것 같았다. 시댁 사람들은 전부 괴기하고 낯설고 어색하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했다. 남편에게 어떤 말을 할라치면 고슴도치마냥 날카로운 침을 세우든 쏘아 붓기만 했는데, 정작 자기 식구들에게는 한마디도 못하며 서로 데면데면하면서도 굉장히 조심스러워 말도 못 붙이는 이 상황이 연이어 3년이 연속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시아버지 맘 내키는 대로 불현듯 쳐들어오는 신혼집에서 불편한 생활을 3년을 하였다. 시아버지는 절대 벨을 누르는 법이 없었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진짜?"
"그래."
"어디 가는데"
또 여기야. 왜 말도 없이 오냐고. 국수 먹고 싶으니까라며 7년을 국수만 먹었다. 그것도 3,500원 했던 국수가 4,500원이 될 때는 더 이상 가려고 하지 않았지만 자기가 갈 곳이 본가 아니면 아무 곳도 모르는 사람처럼 다른 지방국도를 타다가도 그는 심심하고 재미없다며 다시 유턴하여 자기 집으로 간다 했다.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지 너무도 화가 났고, 그 후에는 너무도 불안했고, 그 일들이 계속되는 두려움이나 무서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 임신 중이라 내 감정들이 태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런 걱정들로 흥분되는 화도 맘대로 내지 못했다. 너무 힘들 때는 가족들에게 늘 말했지만 누구도 내 얘기를 경청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경청하는 것 같다가도 아빠는 내게 야속한 말을 했다.
"네가 잘해라. 시아버지 홀아빈디 너무 나쁘게 하지 말고."
라는 말만 할 뿐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삼겹살도 못 먹게 하는 남편의 돼지고기 혐오증 같은 표정들 때문에 집에서도 못 먹게 자꾸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돼지는 암을 걸리게 하는 동물이며, 기름이 좋지도 않은 걸 왜 먹냐며 핀잔을 두면서 냄새도 맡기 싫으니 , 네 주변사람들이랑 먹던지 네 가족들하고 먹으라고 윽박지르는 남편 때문에 임신 중 먹고 싶은 것도 맘대로 못 먹어 서러운 상태였다. 마음이 늘 허했기에 나는 삼겹살을 살 때면 5인분씩 사갔다. 아빠도 좋아하시니 맛있게 먹는 사람들과 먹으면 기분이 배로 좋아지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사가는 날은 맛있게 먹을 상상을 하면 정말 정말 기대되고 기분이 좋았다.
"삼겹살 주세요."
"삼겹살 말고 더 좋은 거 드셔보세요. 임신하셨으니."
라며 정육점아저씨가하시는 말을 처음 듣게돼 의아스러웠다.
그래도 난 삼겹살을 사갔다. 세 번째 정도 사갔을 때 엄마는 무지 화를 냈다. 인자 사 오지 마야. 네가 네 집에서 구워 먹어 귀찮아 죽겠네라며 호통을 쳐서 너무 슬퍼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왜 아무도 내가 먹고 싶은 걸 안 사주는 걸까? 그럼 난 어디서 먹으라는 거지? 임신 10개월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