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일 때 글 쓰다가 자가치료가 된 이야기 <3>
일기를 쓴 지도 햇수로 8년이 되어간다.
물론 매일매일 빠짐없이 일기를 쓴 건 아니지만....
처음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그 시작이 없었으면 지금도 일기를 쓰지 못했을 것이니까!
나는 단기 기억을 위해서 일기를 쓰게 되었다.
우울증이 심하면 기억력이 쇠퇴하는 편인데, 최근의 일도 잘 기억을 못 한다.
당장 어제 점심 저녁으로 뭘 먹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고
친척들을 만난 일이 일주일 전인지, 한 달 전인지 헷갈리는 일이 많았다.
내가 나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일기를 쓰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처음엔 다이어리에 하루 일과를 잠깐 적는 식으로 기록했다.
오늘은 치킨을 먹었다, 오늘은 요리를 했다, 오늘은 카페에 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글자를 더 쓰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고
간단한 일기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일기 전용 노트를 샀다.
그리고 그날의 일을 적다가 마음을 적는 식으로 기록 방법이 바뀌었다.
매일매일은 무리여서 생각날 때마다 썼는데 그래도 한 달에 15일 정도는 기본으로 기록했던 것 같다.
기록을 하면서 좋았던 것은 날짜를 정확히 기억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공모를 언제 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을 때 일기장을 펼치면 되는 것이고,
렌즈를 맞출 때도 마찬가지다. 지난번 렌즈의 기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계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일기가 손에 익을 무렵. 우연히 어떤 사람이 블로그에 우울증으로 일기를 쓰는 걸 보고,
이런 것도 공개적으로 쓸 수 있구나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우울증에 관한 기록이나 일기가 창피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다 지난 옛날 일이었다.
사람들은 우울증 일기를 쓰면서 서로의 동태를 살피고, 위험하면 걱정도 하면서 상호 작용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인터넷에 공개일기를 쓰자는 마음을 먹고 우울증 일기 전용 블로그를 하나 만들어서
일기를 쓰게 되었는데 꾸준히 쓰다 보니 어느덧 1년이란 세월이 훌쩍 넘었다.
1년의 기록을 보니 나의 변화가 많이 느껴져서 뿌듯했다.
일단 일기를 쓰지 않을 때는 우울한 마음을 파악할 줄 몰라서, 그냥 시를 쓰거나 영화를 보는 등
다른 감각으로 회피 아닌 회피를 했는데, 일기를 쓰고나서부터는 감정에 정면돌파 하게 되었다.
어째서 우울한지 어째서 내가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감정을 파헤치면서
나를 좀 더 객관적으로 알게 되었고 나란 사람을 잘 알아가는 것이 좋았다.
감정이 점차 누그러지면서 시간이 지났을 때.
'화낼 일도 아닌데, 내가 성급하게 화를 냈네' 같은, 반성의 시간을 맞이해서도 좋았다.
그러다가 '나'를 주인공으로, 단순한 일상을 적는 일기가 재미없어지면 다른 콘셉트의 일기를 썼다.
한 때는 그게 타로 일기였다. 운세나 점을 보는 건 일상적 일기보다 흥미로운 일이니까.
타로공부를 하면서 매일매일의 운세를 기록하는 게 포인트였다.
타로 공부도 할 겸, 일기도 쓸 겸. 두 가지는 모두 충족되어서 한동안 재밌게 일기를 썼다.
신의 관점에서 한낱 인간의 기록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타로일기도 재미가 없어지면 꿈 일기를 썼다.
오늘은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 꿈을 꾼 이유는 무엇인지 나의 심리를 분석하는 일기.
그런 일기를 쓰고 나면 영감이 떠올라서 시나 소설을 쓰는 데도 도움이 되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