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일 때 글 쓰다가 자가치료가 된 이야기 (2)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책>이나 <다독왕> 같은 키워드는 나와 거리가 멀었다.
나는 책 읽는 데 취미가 없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아이들이 다 좋아하는 만화책도 관심이 없었다.
어릴 때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도 본 적이 없다.
애초에 종이책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부모님도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책과 접촉할 환경 자체가 아니었고 심심하면 티브이를 보고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기 바빴다.
그런데 이십 대에 집에서 은둔만 하며 살다 보니 놀랍게도 티브이와도 거리가 멀어졌다.
가족들과도 대면하지 않아서 방에서만 혼자 지냈는데
내 방엔 개인 티브이가 없었으니 만화나 방송을 볼 일이 드문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심심함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시간을 죽이려고 자연스럽게 책을 읽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 처음 완독한 책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오키 가즈오의 <해피 버스 데이>였다.
이 책은 학생 시절 내가 도서관에 갔다가 대여한 책인데 읽지도 않고 반납하지도 않은 채
학교를 졸업하고 기억에서 사라졌다. 책꽂이에 세월을 정통으로 맞으며 먼지만 쌓인 책인데
표지의 한 문장이 우연히 눈에 띄어서 집어 들게 되었다.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책 안에 적힌 문장이었지만, 왠지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멈칫했다.
그 자리에서 <해피 버스 데이>를 완독 했고, 눈물을 쏟아냈다.
그날 처음으로 독서의 참재미를 알게 된 것 같다.
독서의 제일 좋은 점은 시간이 빨리 간다는 점이었다.
방 안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축내고 싶었던 나였기에 책은 나의 전략적 파트너였다.
나갈 일이 없어서 책을 대여하는 건 불가능했고, 집에서 해결해야만 했다.
일단 집에 있는 책을 모조리 모아 와서 읽게 되었다.
책을 읽을 때만큼 우울증은 잊혔다. 그게 나의 현존 방식이었다.
몇 달 지나자 나의 독서 취향을 알게 되었고, 달마다 무조건 3권 이상 책을 샀다.
어릴 때부터 모아둔 용돈을 그 시절엔 책 사는 데 다 쓴 것 같다.
책을 읽고 싶으면 읽었고, 읽기 싫으면 덮어둔 채 방에서 얌전히 지냈다.
책을 읽고 싶지 않으면 그 책을 필사했다. 미대 입시생이었던 나는 연습장이나 스케치북이 넘쳐났다.
훗날 나의 필사 연습장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학원 선생님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한 이 년쯤 지났을 땐....
내 방에는 발 디딜 틈이 거의 없었다. 책이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의 주인이 나인지, 책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쓴, 책상에 딸린 기본 책장은 이미 과부하 상태로 새책을 보관할 곳이 없었다.
부모님은 밖에 나가지도 않고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 나를 보고 걱정하셨지만,
책이라는 요소가 제법 건강하고 괜찮아 보였는지 어느 날 나만의 책장을 주문제작해 주셨다.
뜻밖의 선물에 신나서 책을 정리했던 기억이 난다.
친정집에 내 방에 가면 지금도 눈에 띄는 건 책장이다.
투박하고 커다란 책장이 직각의 방, 한 면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위용을 내뿜고 있다.
그렇게 책을 읽게 된 지 한 2년 반쯤 흘렀을 때.
나는 컴퓨터에 앉아 소설을 쓰고 있었다.
나만의 장편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된 행동이었다.
독자는 많이 없었지만, 나대로 쓰는 게 재미가 있어서 진행할 수 있었다.
매일 책 읽고 시 쓰고 소설 쓰고 지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귀신에 홀린 것 같다.
낮 12시에 쓰기 시작했는데, 다 쓰면 낮 12시라서 시간을 잘 못 본 줄 알았다.
하루 24시간이 그냥 지나가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후다닥 지나갔다.
그때 쓴 소설은 한 편에 만 이천자로 21편을 마지막으로 완결 냈다.
지금 돌이켜도 내 인생에 길이길이 기억이 남을 성취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