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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메리 Mar 22. 2024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은 필사하기

우울증일 때 글 쓰다가 자가치료가 된 이야기 <4>


독서를 시작한 건 좋았지만, 읽은 책이 쌓일수록 예전 책을 잊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좋았던 책이지만 그 이유를 떠올려보면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명확히 생각나지 않고

다시 책을 펼쳐야만 했는데, 우울증이 심할 땐 책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번거로움과 불편함 때문에 필사를 시작했다.


필사의 좋은 점은 무언가를 기록하는 재미가 생긴다는 점이다.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탓인지 종이에 글을 적는 일만으로도 나에게 굉장한 안도감을 주었다.

한때 다꾸를 좋아한 짬으로 스티커를 필사에 어울리게 붙이는 재미도 있다.

직접 기록하면서 문장을 곱씹어보고, 의미를 되새길 수 있으면 비로소 나의 문장이 되기도 했다.

필사를 자주 할 때는 좌우명도 여러 번 바뀔 정도였다.

 

새로운 '취미'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필사에 매료되어서 이제는 관성이 되었다.

대여한 책을 반납하기 전에 무조건 필사 작업에 들어간다. 

일단 책을 읽고 싶은 만큼 읽고, 그중에서 마음에 들었던 부분들을 필사한다

시간이 없다면 일단 핸드폰으로 찍어놓고 나만의 <필사 전용 밴드> 앨범에 올려놓고

한갓진 날에 천천히 필사를 한다. 그럼 그 작품의 좋은 점이 다시 떠오르고 기분이 좋아진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글씨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잘 못 썼다면 스티커나 수정테이프를 붙인다.

나는 굉장한 악필인데, 필기체에 일일이 신경을 썼다면 필사는 오래도록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악필이라서 글씨가 마음에 안 들면 노트를 북북 찢기 바빴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노트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새 노트에 필사를 했는데 

몇 년 후에 장이 새하얀 지켜보면 종이와 돈, 시간이 모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글씨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솔직히 명필보다 나처럼 악필인 사람들이 세상에 더 많지 않을까? 

악필일수록 글씨체를 그리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알맹이를 보는 연습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명필이면 좋지만, 악필이어도 상관없다. 무엇이든 예쁘고 좋은 상태만 완벽한 완성은 아니니까. 


필사를 오래 할수록 기록할 일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처음에는 기억하기 어려운 산문 책이나 논픽션의 글들만 필사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시만 묶은 필사 노트도 따로 만들게 되었고 

그 노트는 디폴트값이 기분이 좋은 상태이니 우울하거나 힘들 때마다 다시 펼쳐보고 읽기도 했다.

그럼 마법처럼 나 스스로 위로가 되어서 기분이 차분해지고, 꽤 괜찮은 하루의 마무리가 될 수 있었다.

또 책뿐만 아니라 드라마 대사 같은 것, 좋아하는 노래 가사 같은 것도 기록했다. 

지나가는 말들도, 사람들의 조언들도 기록하며 필사 노트는 점점 두꺼워졌고 하나를 전부 완성하게 되었다.

필사로 채운 노트가 여러 권이 쌓이면 부지런하다는 기쁨에 도취되어 그날은 꽤 행복함을 맛본다.


다른 사람들의 필사 노트를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sns나 사이트에 필사만 검색해도 다양한 필사 노트를 구경할 있었다. 

오픈카톡에서도 필사 채팅방에 들어갔는데 매일 부지런하게 필사하는 보노라면 

나도 좋은 문장을 골라서 열심히 필사해야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필사하면서 나는 글씨체가 많이 나아졌다. 완전한 악필에서 평범한 글씨체로 말이다.

캘리그래피를 할 정도로 명필은 아니지만, 악필을 벗어나서 평범의 범주에 들어갔다는 게 어디인가!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는게 얼마나 값진 결과인가. 하하.



첫 필사노트. 귀여운 메모가 있어서 찍어보았다. 다이어트하면서 라면 식단은 실패한 듯. 연재소설 이야기와 하반기의 계획과 좋아하는 시 필사.


당시에 하던 예능 명언도 적고, 재방송으로 보던 드라마 대사도 적었다
좋아하는 시만 있는 시노트
2024년 현재 쓰고 있는 필사 노트. 우연히 본 좋은 문장들과 대여한 책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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