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씨
※ 이 이야기는 성인 독자를 위해 재해석된 '토끼와 거북이'입니다.
시간이 흘러 프로젝트는 다시 발표됐고, 이번에는 성공적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번 발표는 막내인 분홍 토끼가 진행했다. 그리고 하이에나 선배는 프로젝트에서 빠졌다.
그리고 분홍 토끼는 프로젝트 공로로 대리로 특별 승진을 했다. 결국 난 또 1등을 놓쳤다.
“휴…”
“거북이 씨 괜찮아?”
“아…네, 점심 먹은 게 소화가 안 돼서요.”
“그래? 소화제 좀 줄까? 나도 소화가 잘 안 되는 편이라 항상 자리에 있거든.”
“네, 선배님 감사합니다.”
오소리 선배는 자리에서 약을 가지고 와서 건네주셨다. 늘 성실하고 친절한 선배다. 약을 마시고 있을 때 오소리선배가 다시 말을 이었다.
“프로젝트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어. 속상하지?”
선배의 말 한마디에 속에서 울컥 조각난 감정이 올라왔다.
“아니에요. 잘됐죠.”
“우리 다 알고 있어. 거북이 씨 열심히 한 거. 그리고… 이건 여기서만 하는 말인데. 다들 알 거야. 그 프로젝트 실수가 거북이 씨 문제가 아니란 거. 하이에나대리가 아무래도 이사님 조카라서… 알지? 회사가 좀 그렇잖아.”
“아…”
“몰랐어? 하… 하이에나 대리가, 치타 이사님의 외조카야. 그래서 그날도… 아무튼 그래도 토끼씨가 거북이 씨 자료가 이상 없다는 것을 이사님께 증명해서, 하이에나씨가 인사팀으로 옮긴 거니까. 나중에 토끼씨한테 밥이나 한 번 사”
몰랐다. 하이에나 대리의 정체도, 토끼가 이사님과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일게 사원이 이사님과 단판을 한 건가? 나 때문에?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빨리 말랑푸딩 분홍 토끼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직도 말랑한지. 우리가 아직도 친구인지.
하지만 우리는 한동안 만나기 힘들었다. 프로젝트가 성공하면서 연일 회의와 외부 출장 등으로 분홍 토끼를 회사에서 보기 어려워졌다. 그러고 보니 연락처도 모르고, 알아도 갑자기 연락하기도 뻘쭘했다. 그리고 나도 내게 새겨진 주홍 글씨를 지우기에도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사님의 오해는 풀렸고 사내에 소문도 돌았다지만, 그래도 평판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잘 나가는 분홍 토끼와 비교되면서, 나의 평판은 더 좋지 않았다. 분홍 토끼의 도움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거북이? 이런 느낌이랄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소중한 영광마저 내가 망가트리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다시, 다시 추월해야 한다. 엄친아가 되어버린 분홍 토끼를 따라잡아야 했다. 이대로면 나는 회사의 부진아가 되고 말 테니까. 그리고 한 번 비교의 대상이 되니, 모든 일을 비교당했다. 그러니 그 굴레에서 승리하거나 벗어나기 위해 발악에 가까운 노력이 필요했다.
모든 선배님들의 일을 지원하고, 매일 같이 야근을 하며 다시 업무를 배우고 처리해 갔다. 통상임금으로 야근비도 없는 끝없는 열정 페이 일상이었다. 그래도 나는 성실함으로 그 시간을 버텼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신상품의 마케팅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회사의 주력 상품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해서 성공만 한다면 옅어진 주홍글씨를 완전히 지울 기회였다. 물론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휘청댔다.
“거북이 씨, 많이 힘들지? 그때가 가장 힘들 때야. 나도 그랬어. 그래도 그 시기만 버티면 한 명의 마케터가 되는 거니까”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오소리 선배는, 언제나 필요할 때 나타나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줬다. 마치 수호천사처럼.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도와줄 테니까.”
오소리 선배님이 도와주신다니 든든했다. 사실 오소리 선배님은 과장으로 본인 업무로도 바쁜 분이셨다. 회사가 인정하는 능력자로 기대가 높아서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책임감도 높아서 그 모든 일을 묵묵히 해내시는데, 회사는 믿고 또 그만큼의 일을 주는 능력자였다. 그래서 매일 나의 야근 메이트가 돼주시는 거지만. 나의 롤 모델이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오소리 선배의 도움으로 막혔던 부분들을 해결했고, 결국 신상품은 성공시켰다. 그 결과 부장님 눈에 들었다. 주홍글씨를 지워냈다.
“거북이, 자네 제법 일을 잘하는데”
덕분에 동기들 중 가장 늦긴 했지만, 대리로 승진했다.
하지만 분홍 토끼는 벌써 과장 진급 대상이 되어있었다. 분홍 토끼는 고속도로를 달리듯 승승장구했고, 나는 그 뒤를 자전거를 타고 쫓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녀석이 과장이 됐을 때 나는 여전히 대리였고, 녀석이 차장이 되고도 한참 후에 과장 진급을 대상이 됐다. 아무리 달려도 거리는 좁혀질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 죄송해요.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는 자식이 되고 싶었는데.’
입사 10년 차, 나는 과장 녀석은 차장으로 이제 곧 부장이 될 것 같았다. 한번 벌어진 우리의 격차는 도무지 좁혀질 생각이 없었다. 우리의 사이처럼. 나는 쓰디쓴 소주를 목구멍으로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까지는 분홍 토끼가 술 마시자는 이야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다. 우리는 입사하고 한 번도 같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차 한 잔도 단둘이서 마시지 않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까지 틀어졌을까.
“혼자 마시니?”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