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발표
※ 이 이야기는 성인 독자를 위해 재해석된 '토끼와 거북이'입니다.
나도 그것이 의문이긴 하지만,
거부할 입장은 못됐다. 일부에서는 분홍 토끼가 양보했다고 하는데. 그럴 리가 없다. 누가 이런 기회를 양보한단 말인가. 그것도 20년 전에 잠깐 알았던 친구를 위해? 말도 안 된다. 100통의 편지에 단 한 번도 답장을 안 했단 말이다.
그러니 나는 증명해야 했다. 내 실력으로 이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선 분홍 토끼처럼 농땡이 칠 시간이 없었다. 매일 6시 정각에 퇴근하고 업무시간에는 선배들 하고 수다나 떠는 저런 녀석과 비교라니, 너무 속상한 일이 아닌가. 갑자기 속이 거북해지며, 단단해진 등딱지로 머리를 넣고 싶어졌다.
‘참아. 버티는 거야. 버티면 이긴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일부에서는 ‘성실한 거북이’ vs ‘농땡이 치는 토끼’란 이미지도 있는 듯했다. 그것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성실한 아버지처럼 자신도 분홍 토끼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꾸준한 성실함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특기였다. 이번에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직 시작도 안 됐지만, 승리감에 도취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너무 무리해서 정신이 이상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정신 차리고 일하길 몇 주. 드디어 프로젝트 발표 일자가 잡혔다.
“하하하 발표는 제가 하겠습니다.”
하이에나 대리님은 자신이 발표자를 자처했다. 당연히 TF 팀의 리더인 곰과장님이 진행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아무도 말이 없었다. 기획도 곰과장님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내는 이럴 때 조용히 대세를 따르면 된다. 그래서 등껍질 먼지만 털어냈다.
‘뭐 알아서 하시겠지.’
이 생각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발표 도중에 사고가 터졌다.
“이게 뭔가! 숫자가 하나도 안 맞잖아! 자네들 기본도 안 됐구먼!”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중요한 데이터 산출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서 전체 결과가 틀어졌고, 프로젝트는 다시 수정에 들어가야 했다.
“이사님 죄송합니다. 거북씨가 작업하면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제가 체크했어야 하는데, 너무 성실하게 잘해와서 제가 마음을 놨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거북씨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안 되겠구먼. 실력이 안되면 선배들에게 확인을 받았어야지!”
“그게 아니라…죄송합니다.”
하이에나 대리님 한 마디로 난 순식간에 주범이 되었다. 억울했다. 분명 완료된 자료를 대리님에게 검토 요청했었고, 이상 없다고 해서 올렸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모두 내 잘 못으로 말하는 대리님이 너무 야속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믿어줄 사람도 없으니까.
그때 분홍 토끼가 눈에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피했다. 그러고 보니 분홍 토끼가 자주 어울리던 선배가 하이에나 대리님었다. 지금 나를 나락으로 보내는 하이에나 대리님.
이후 나에게는 ‘실수한’, ‘꼼꼼하지 못한’, ‘사고 친’ 이란 낙인이 붙었다. 결국 프로젝트에서 나오고, 나 대신 분홍 토끼가 들어갔다.
“미안해서 어쩌지…”
“돼… 됐어… 잘해봐. 너라면 잘할 거야”
‘잘하지 마. 제발 잘하지 마’
속마음과 다른 말을 건네며, 웃었다. 아니 웃으려 했는데 입에 경련이 일었다.
‘너지? 하이에나 대리랑 수를 쓴 게?’
마음에서 의심이 싹텄다. 그리고 얼마 뒤 회의실 정리를 하다가 하이에나 대리와 단둘이 마주쳤다.
“하하하, 거북이 씨 너무 속상해하지 마”
‘너 같으면 안 속상하겠냐?’
“그럼요 대리님, 다 제가 부족했는데요. 그날 대리님께 자료 검토 요청드리면서 꼼꼼히 봤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그러게 말이야. 난 거북씨가 당연히 다 잘했을 줄 알았지. 하하하.”
‘양심 있으세요?’
속마음과 다른 말을 하며, 속을 삭혔다. 이 말을 사무실 한 가운 대서 나눴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꼭 이렇게 뒤에서 말하는 하이에나 대리의 속내를 모르겠다. 그때 분홍 토끼가 나타났다.
“토끼씨 거북이 씨한테 자료 넘겨받았어? 뭐 다 수정해야 하니, 새로 만드는 게 오히려 빠를 수도 있겠지만.”
“자료 다 받았습니다. 확인했을 때 수정할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하던데요. 수치도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
“대리님, 그보다 부장님이 찾으세요.”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하이에나 대리는 성질을 부리고는 다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할 말이 없는 우리 둘만 남았다. 분홍 토끼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듣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그럼 먼저 들어간다.”
“어… 그래”
시간이 흘러 프로젝트는 다시 발표일정이 잡혔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