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통의 편지와 백번의 의미
※ 이 이야기는 성인 독자를 위해 재해석된 '토끼와 거북이'입니다.
‘신입사원 환영회’에서 입사 수석과 차석으로 다시 만났다.
“어! 너 거북이 맞지?”
“어! 너 토…끼야?”
“반갑다!! 잘 지냈어? 너무 보고 싶었다!”
“어… 잘지 낸 것 같네.”
극적인 첫 만남 이후 우리는 마케팅 부에 발령받았다.
“오오 운명! 역시 우리는 만날 운명이었나 봐~!”
“그…. 그런가? 하하.. 잘 부탁해”
마치 어제 보고 다시 보는 것처럼 스스럼없는 태도, 반가운 목소리. 딱 검은 토끼 아저씨 아들 티가 나게 자란 분홍 토끼였다. 반가웠다. 나도 반가웠지만, 어쩐지 부담스러운 마음이 올라왔다.
내가 보낸 100통의 편지에 답장 한 번 하지 않은 녀석이다.
그런데 뻔뻔하게 아무 일 없었다고 나오는 녀석이 마냥 곱게 보일 수 없었다. 이해는 한다. 한라산에 가자마자 국제 학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아버지께 들었다. 그 사악한 학교에서 적응하려면 바뻤겠지.
국제 학교는 해외에서 온 모든 동물들이 다닌다. 초식계부터 육식계까지. 육지 최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말랑푸딩 같은 녀석이 버티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검은 토끼 아저씨가 뭘 믿고 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신뢰에 부응하듯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다고 한다. 여우의 지혜나, 사자와 호랑이의 힘 앞에서 지지도 않고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하루에 한 마디도 잘 안하시는 과묵한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그 이야기를 하셨다.
“검은 놈이 결국 아들을 국제 학교에 보냈다지 뭐야? 아들 하나는 잘 키웠어.”
‘아버지 자식은 저인데요.’
문득 밖에서 ‘내 이야기도 저렇게 해 주실까’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부끄러워서 얼굴을 등딱지 안으로 숨겼다. 과묵하신 아버지가 밖에서 ‘말’이란 것을 하실 리가 없고, 자랑하려 해도 그럴만한 내용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등딱지가 구겨지고, 마음이 찌그러진 캔같이 좁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구겨진 마음을 회복하고 자랑할 만한 아들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하지만 언제나 성적은 만년 2등이었다. 딱 내 앞에 하나를 이길 능력이 안됐다.
‘사막 여우면 국제 학교로 갈 것이지.’
아버지가 1등을 얼마나 바라시는지 알기 때문에, 만년 2등의 타이틀이 더 부끄러웠다. 그래서 2등이 새겨진 성적표를 차마 보여드릴 수가 없어서 숨긴 적도 많았다. 꾹 다물어져 있는 아버지 입에서 '한심하다'는 말이 나올까 봐 늘 겁을 먹었던 것 같다. 언제까지 숨기기만 할 순 없어서 미적미적 내밀면, 담담하게 '수고했다'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얼마나 감사하던지. 언젠가는 꼭 "잘했다"란 말을 듣기 위해 더 노력하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졸업할 때까지 전교 1등인 사막 여우는 전학 가지 않았고, 나도 반에서 2등만 했다.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신 적이 없지만, 늘 1등 한다는 분홍 토끼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것도 반에서 2등 하는 자신과 달리 전교 1등이라니. 비교 대상조차 되지 못하지만.
그런데 한 회사에 그것도 동기로 만날 줄은 몰랐다. 토끼라면 당연히 대기업이나 외국계 회사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해. 많이 도와줘~!”
“내…내가 도와주긴…네가 더 잘 할 텐데… 너 수석 입사 아니야?”
“하하하 운이 좋았지. 아 이렇게 말하면 재수 없나?? 진짜긴 한데… 넌 오해 안 할 거니까!!”
나는 속이 거북스러워졌다. 운이 좋았다니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녀석도 재수 없는 말인 것을 아는지 다급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의미는 없지만.
‘나도 속 좁은 거북이다. 오해 안 하긴 재수 없게, 우리가 어디 그런 사이냐?’
2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도, 녀석은 마치 어제 헤어진 것처럼 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재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오래 쓸 시간이 없었다. 우리 둘 다 신입사원이기라서 일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벅찬 나날이 지나갔다. 특히 나에게는 커다란 기회가 생겼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