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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철 Sep 15. 2018

사랑이 떠난 자리에, 같은 사랑이 올 수 있을까?

같은 자리에 같은 사랑을 채우려는 사랑.


오래전 '아주 잠깐' 만난 사람은 우리가 사귀기로 결정한 날, 내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자신을 'XX 강아지♥'로 저장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가끔 그렇게 불러달라 말했다. 나는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 바라는 방식대로 예의를 다하는 것은 퍽 중요하니까. 어쩌면 그녀가 사랑이 될 수도 있는 터였다.


그러나 끝내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나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쩌다 끌려서 만났고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렇지도 않게 끝났다. 그녀도 아프지 않았고 나도 아프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그녀에게 나는 스치는 사람이었다. 그녀도 내게 그랬다. 그녀에게 나는 단지 애칭을 불러줄 자리에 잠시 앉을 이였다. 나에게도 그녀는 아픔이 있어보이는 매력적인 이일 따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때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때 그녀와 같은 마음으로 다른 이를 만나려던 때가 있었음을 기억한다. 20대를 돌이켜보니 나는 '사랑'하며 보낸 시간보다 혼자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아직 나의 자아가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누군가가 의지하기를 원하지 않아서 였던 것 같기도 하다.(덜 자랐었다고 해두자.) 아무튼 그런 나도, 가장 오래 만났던 관계가, 사랑이라 믿고 싶던 시간이 비극적(!)으로 끝난 후에, 빈 자리를 채울 존재를 찾으려 했었다. 나는 '같은 사랑'을 찾으려 헤메였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존재는 없었다.


오래 지나 이 사진을 찍은 때가 그저 시간으로 다가왔을때, 나는 진심으로 사랑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냥 사진이다 이젠.




우리가 채우고 싶은 것은 사랑일까. 아니면 그것이 있던 자리일까.

언젠가 20대 내내 연애를 거의 쉬지 않은 내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연애를 쉬지 않고 했던 건 '있던 것의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이 싫어서 였던 것 같아. 계속 그 자리를 채우고 싶었던 것 같기도. 물론 배웠지. 아무나 아무 때나 사랑할 수는 없다는 걸."


내게 사랑이 사랑으로 잊혀진다는 말은, 다음의 경우에만 맞았다. 

사랑했던 사람과 그 마음으로부터 졸업할 충분히 시간이 지나갔을때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다시 '새롭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은 그제서야 비로소 생겨났다. 정말 사랑이라 믿을만큼 사랑했다면, 졸업하지 못한 마음은 새로운 이와의 사랑에 반드시 영향을 주었다. 여전히 잔상이 남은 채로 만난 새로운사람에게 나는 마음이 없는 매너를 다했다. 그녀는 알았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내가 사랑할 수 없었다는 것을.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녀도 사랑받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아주 매력적이고 당당한 사람이었다. 단지 그때 과거로부터 졸업하지 못한 내가 있을 뿐이었다. 그 기억 이후로 나는 졸업하지 않은 채로 사랑하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중한 다른 이에게 상처를 남기는, 마음빚을 지는 일이다.


모든 연애가 진한 사랑일 필요는 없다. 저마다의 사랑이 자라려면 저마다의 탐색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스치듯 지나는 인연도 있다. 다만 잠시나마라도 시간을 보냈다면, 그 인연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나는 그를 단지 필요로 만난 것은 아니었는지. 내가 그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고 고민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이 생각과 고민이 언제 만나게 될 지 모를 인연을 위한 일이라 믿는다. 그때 나는 더 자란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가장 뜨거웠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빈 자리는 빈 자리대로 두기로 했다.

나는 애써 그 자리를 채우지 않을 것이다.

그저 글을 쓰고 일을 하고 노래를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시간을 보내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나는 다시 사랑해야지.

그때가 오면 예의를 다할 연애말고, 최선을 다할 사랑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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