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거의 매일 "뭐 좋아하세요?"라는 질문. 나..뭐 좋아하지?
사회생활을 하며 우리는 매우 빈번히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이 궁금하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사는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대체로 외양과 객관적 지표에 대한 것이 많겠으나 우리는 그 사람의 내면도 참 궁금하다. 함께 잘 지낼 수 있는 성격인지 궁금하다. 만약 내가 소개팅이라도 한다 치면, 그 사람이 '매력적'인 사람인지 참 궁금하다. 매력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그중 일부는 어떻게 일상을 채워나가느냐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이 무엇을 입고, 먹고, 마시는지. 어떤 음악을 듣고 부르고, 무엇을 읽고 쓰는지. 어찌 보면 소비한 취향은 일상에 대한 지문이며 나이테다. 한편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말하듯 취향의 소비로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계급에 속하는지,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잠시 있어 보였다.)
가령 처음 만난 어떤 사람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당연히 그 사람의 취향에 대한 정보중 극히 일부일 것이다.
정기적으로 '골프 라운딩'을 즐기며, '모노클'이라는 잡지를 구독하고, 대극장 뮤지컬을 분기에 1번 이상 본다. 커피는 '드립 방식'을 좋아하고, 술로는 '싱글몰트 위스키'를 좋아한다. '온 더 락' 방식으로는 마시지 않는다.
이상의 정보들은 이 사람을 좀 <있어 보이게> 한다. 물론 가상의 인물이며 나와는 아주 거리가 있다. 다만 진술들을 통해 당신은 이 사람에 대해 섣부르고 믿을만한 판단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사람은
1)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소비력을 가지고 있겠군
2) 왠지 까다로울지도 모르겠는걸? 곱창에 소주 먹자고 하지 말아야겠어.(왠지 선입견이 생긴다.)
3) 영어를 잘하거나 외국에서 살다왔나? 집안이 잘 살지도 모르겠어.
이러한 판단은 단견이자 편견이겠지만,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가상으로 만든(주작) 취향이지만 이렇게 어떤 사람에 대해 인상을 만들어내기엔 충분하다. 누군가를 정말 알고 싶다면 구태여 "뭐하는 분이세요?" 라 묻지 않아도 된다.
말한 취향에 대해 연이어 묻자면, 진짜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척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진짜 대화 습관이 나오는 것 같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네이버 국어사전을 먼저 보자. 사전은 말한다. 취향이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
이라고 하는데 왠지 충분하지 않다.
예문으로는
¶ 취향이 독특하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다 / 고객의 취향에 맞추다 / 손님의 취향을 고려하다/나는 그녀와 취향이 비슷하다.
음.. 역시 충분하지 않다. 영어로는 'Taste'라고 한다는데, 미각이나 냄새의 의미를 제외하면, 사전을 보면 <좋아하는 것들의 묶음이나 경향, 소비 양상 >으로 보인다.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취향과는 약간 미묘하게 다른데 <즐기고 좋아한다>는 '기호'의 의미가 더 강한 것 같다. (기호에는 무엇이 좋고 싫다는 '호오'의 늬앙스도 있다.)뭔가 어려워졌다. 최근 우리가 쓰는 '취향'의 의미는 사전적인 취향의 의미에 <기호>의 의미가 강하게 더해진 것 같다.
나는 취향을 편의상 이렇게 정의 내리겠다.
무엇을 입고, 먹고, 듣고, 보고, <하며> 일상을 채우는가에 대한
경향성과 구분이 되는 기준
취향은 <하다>를 더할 때 특별해진다.
취향이 무엇이냐 묻는다는 것은 풀어 말하면, <어떤 사람이 무엇을 입고, 먹고, 듣고 보고, 읽고, 쓰고, 하면서 일상 보내는가>를 묻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하다'이다. 무엇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소비를 한다는 개념을 넘어선다. 돈이 있으면 먹을 수 있다. 입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이러한 소비의 선택에도 기준은 필요하겠지만 무엇을 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한다는 것'은 기준을 내가 세우고 실행하는데 꽤나 큰 능동성을 요구한다. '취미'를 포괄하는 개념에 가깝다. 취미에서의 <한다>는 수동적으로는 <입고, 먹고, 듣고, 본 것 등>에 대해 평가하고 쓰고 기록하는 것으로, 적극적/능동적으로는 해당 행위에 관련한 무언가를 지속 생산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보는 사람, 듣는 사람, 먹는 사람은 많은데 '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다. 제대로 하는 사람은 정말 적다. 노래하고 버스킹하는 것이 이따금의 취미인 내게는 돈이 많이 든다기보다는 시간을 확보하고, '의도'를 세우는 노력이 많이 든다. 돈을 벌기 시작하며 좀처럼 예전 정도로 노래와 버스킹에 몰입하기가 어렵다. 애써 시간을 들여 무엇을 해야할 필요. 그게 참 어렵다. 취미로 발전한 취향은 그랬다.
가끔은 의문이 든다.
우리는 일상을 채우는 방식에서 정말 주인이었을까?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소비를 한다.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은 사회와 주변 환경의 영향이 대단히 크다. 당연히 어릴 때부터 노출된 광고와 미디어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유일한 영상 매체는 티브이였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부모는 지식노동자들은 아니었다. 집에는 항상 티브이가 켜져있었다. 나도 티브이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포켓몬스터가 처음 방영했다. 내 친구들은 띠부띠부씰(포켓몬 스티커)이 들어있는 포켓몬빵을 오지게 사먹었다. 이어서는 디지몬이었다. 디지몬에는 '선택받은 아이들'이 나오는데, 정작 그것을 보는 애들은 가장 평범한 애들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본 티브이에서 구스타프 말러가 (잘)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그 '명사'(noun)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누군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해주지 않으면, 보여주지 않으면 우리는 그 존재를 알 수 없다. 존재를 알아도 그것을 제대로 경험하려면 시간이, 돈이 필요하다. 스시가 있는지 알아도 스시를 먹어보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것을 일상적으로 먹을만한 시간, 돈,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좋은 스시를 먹으려면 더 그렇다. 어떤 취향에는 시간이, 돈이, 여유가 필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 주변에 있는 것들만 우리는 향유하게 된다.
나의 부모는 신문을 정기 구독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나는 티브이를 좋아했다. 보다 못한 엄마는 학습만화를 많이 사줬다. 운이 좋게도 나는 그 만화들을 좋아했다. 나는 악보는 볼줄 모르지만, 역사 인물은 좋아하고, 이따금씩 학습만화를 따라 그리는 유년-청소년기 애가 되어있었다. 어쩌다 중1때쯤 티브이에서 노래하는 썬구리를 쓴 아저씨를 보았는데 그 사람이 신해철이었다. 이미 리즈 시절(전성기)는 한참 지났다지만 왠지 그 사람이 좋았다. 전집을 들었는데 나에게는 잘맞았다.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게 된 계기도 아마 그 이유같다.
채널이 티브이와 잡지 밖에 없던 시절, 슈퍼스타들은 수많은 스타일의 추종자들을 만들었다. 비틀즈 존 레논은 세기의 아이콘이었다. 입대전 지 드래곤도 아이콘이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그들을 참 똑같이 따라했다. 아마도 추종자들은 존레논이 아닐테고, 지드래곤도 아닐텐데 말이다. 인스타그램과 SNS, 뉴미디어가 발달했지만 이른바 '인플루엔서'가 만들어낸 스타일을 찍어내듯 따라한다.
내가 영원히 졸업하지 못한 학교, 홍대 앞을 걷다보면 뭔가 잘 안어울리는데 똑같은 스타일을 많이 본다. 최근에는 '랩을 중심으로 한' 힙합이 트렌드다.(그럼 힙합이 랩이 중심이지 다른 게 중심이냐! 라고 할 수 있는데 랩 스타일과 스킬'만' 과도하게 주목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철저히 어디까지나 제 맘대로 생각.) 다소 마이너하게는 90년대 스타일과 레트로도 트렌드다. 힙합과 레트로와 90년대가 묘하게 공존하는 요즘의 거리다.
나는 20살 이래로는 티브이도 잘 안보고, 차트 순위대로 일괄 음악듣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20-21살 즈음에는 좀처럼 새로움에 노출되지가 않았고, 중학교 때 좋아하던 신해철과 넥스트, 윤도현 밴드, 몇몇 인디 밴드 노래를 듣다보니 그 안에서는 더 들을 게 없었다. 새로움이 필요했다.
그 무렵 내 주변은 뭔가 첨단이었다. 내가 모르는 것들을 알고 있는 멋진 친구들도 제법 있었다. 그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읽기 시작했다. 잘 모르지만 락 페스티벌에 따라도 가봤다. 어떤 것은 좋았다. 어떤 것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내한 오는 외국 가수들은 공연에도 가보면 좋았지만 누군지는 잘 모르겠고, 떼창을 하는 관객들이 그저 신기했다. 이후에도 내가 따라부를 정도로 좋아지지는 않았다. 나도 저들처럼 세련되면 좋을텐데!
나는 취향의 길을 헤메이고 있었다.
취향은 힘이 세다. 취향은 내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어쩌면 내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어디에 속하는지 말해준다. 이것도 나중에서야 한 생각이다. 20대 초반 나는 나의 취향이라 말할 뭔가가 없었다. 티브이를 보는 것은 싫었다. 의식적으로 다양한 것을 입어보려 먹어보려 들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새로운 것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나는 따라하는 것은 정말 싫었다. 영향받을 수는 있으나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었다. 무엇을 좋아하고 추종(?)하는데는 납득의 계기와 충분한 과정이 필요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래서 나는 많은 것을 좋아하기보다 좋아하는 것들의 밀도를 높이기로 했던 것 같다.(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었으니 추측일 수 밖엔 없다.)
머나먼 21살 때였다. 나는 학교 가기가 싫었고, 군대도 안가고(방황하고 창업하다 군대를 27살에 갔지;;) 1년을 그냥 놀았다. 다만 '가르치는 일'은 재밌어서 그럭저럭 곤궁한 돈은 벌었다. 집에는 기타가 있었다. 엄마가 기타를 배우고 싶어서 사둔 06년산 콜트 기타였다. 친구들과 작은 공간을 빌려 밤새 놀기로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엄마 기타를 메고 나갔다. 엄마는 난색을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타는 엄마꺼니까. 나는 당연히(?!)기타를 칠 줄 몰랐고 내 친구는 조금 칠 줄 알았다. 친구는 멋있어 보였다. 나는 멋이 없어보였다.
돌아와서 기타를 봤다. 가정 경제에 기여할 겸, 벌어둔 돈으로 엄마에게 기타를 샀다. 교본을 보는 것은 귀찮았고, 내 방식이 아니어서 10cm의 <오늘밤은 어둠이 무서워요>와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를 한 마디씩 부르면서 코드를 봤다. 어떤 모임이 있으면 기타를 들고 다녔다. 당연히 잘 못했지만. 인디 밴드 노래나 예전 노래들은 코드가 비교적 단순해서 기타치면서 노래하기 편했다. 결국 중딩때 좋아하던 것들이었다.
22살 때는 친구들과 <데뷔 겸 은퇴공연™>을 했다. 23살 때는 학교 축제 무대에서 공연을 했다. 그 무렵 버스킹 장비를 샀다. 50만원 정도 들었다. 이후에도 계절에 한 번 정도 거리로 나가 공연을 했다. 버스커들은 언제나 '요즘 노래'들을 참 많이 불렀다. 나는 부르고 싶은 노래들을 했지만, 사람들이 듣고 싶다는 노래들을 기억해두었다가 집에서 듣고 기타로 쳐보았다. 좋은 것은 기억해두고 아닌 것은 알아만 뒀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듣는 취향'을 익혀갔다. 21살 때 그 기타도 함께였다. 지금까지도.
어떤 음악은 어떤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 시대의 패션, 사고, 정서 등을 담는다. 그런데 나는 그 시대 사람이 아니다. 때문에 지금 내가 그 시대 노래를 하면, 그 시대를 보낸 이들에게는 새롭고, 그 시대를 모르는 지금 사는 이들에게도 새로울 수 밖에 없다. 내 노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노래하는 것이 즐거웠다. 홀로 여행을 할 때도 이따금씩 버스킹 장비들을 가져갔다. 오지게 무거웠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사람들이 좋아해주니 좋았다.
다시 환기해보자.
취향은 말한다.
무엇을 입고, 먹고, 듣고 보고, 읽고, 쓰고,
하면서 일상을 보내는가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무엇에 대한 호오(좋고 싫음)가 생기고, 선택과 편집을 통해 구성된 나의 <호오의 총체> 그것은 취향이다. 호오라고는 썼지만 좋음과 덜 좋음에 가깝다.
요즘엔 입는 것, 먹는 것, 듣는 것, 읽는 것까지 취향을 추천하는 서비스들이 많다. 예전보다 취향 정보가 많아졌고, 상대적으로 경험이 쉬워졌다. 모든 것을 할 수는 없겠지만, 경험의 폭을 넓혀가며 '나에게 맞는 것'을 선택했으면 좋겠다.
취향의 본질은 선택에 있다. 나는 EDM이 나쁘게 들리지 않는다. 다만 애써 찾아 듣지는 않는다. 짜장면을 먹을 수는 있지만 애써 안먹는다. 다들 축구를 좋아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그렇다. 스트릿 패션은 멋있어 보이지만 왠지 나에게는 안맞는 것 같다. 나는 마룬 파이브 노래를 잘할 수 없다. 골프는 관심이 가지 않고, 여유도 없다. 나는 가수 조용필을 '선생님'이라 부르고 비처럼 음악처럼을 좋아하는 내 나이에서도 유독 옛날 사람이고, 촌스러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게 나다. 취향을 선택하며 나는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을 알아가기 혹은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한편 취향을 <-하는 것>의 궁극은 재해석과 생산에 있다고 본다. 단순히 소비만 해서는 내 것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를 '평가'라도 해야한다. 그 주관이 나를 만든다. 취향을 쌓아간다는 것은 단지 먹고 마시고 입는다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고 그것을 재해석하여 넓이와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이다. 그러면서 만들어진 '자신의 기준'으로 '편집'하여 내가 좋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이다.
당신의 취향이 남들이 보기에 세련되지 않아도 좋다.
그냥 취향을 찾아가며 자기 자신을 알아가고 그렇게 선택한 취향이 '자기답다'면
그 취향이 가장 멋진 것 같다.
하지만 현대인은 바쁘고, 시간은 적고 체력은 모자라며 돈은 빠듯하다.
입고 먹고 들을 수는 있겠으나 취향을 <하기는> 쉽지않겠다.
그러니까..
아
좋은 취향을 가지기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