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죽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그럼 애써 살아야 할 이유는?
언젠가 딱히 죽고 싶지는 않지만, 열심히 뭔가를 해내며 사는 것이 귀찮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꼭 무엇이 되어야 할까? 그냥 살다 보면 뭐든 어떻게 되지 않을까?
이런 안일한 생각을 이어가다
문득 생각해보니...
어느 날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왜 태어났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태어났기에 나는 살아있다. 치명적 사고를 당하거나 살인자를 만나거나, 죽을병에 걸리거나, 자살하지 않는다면 나는 꽤 오랜 시간 생존하게 된다. 나는 언젠가 죽게 되겠지만 어쨌거나 기대수명을 전후로 몇십 년은 살 것이다.
나는 아마 앞으로 50년은 더 살 것으로 '기대된다' 비명횡사하지 않으면 그렇다.
여기에서 '살아있음'은 생물학적 생존이다. 숨이 붙어있고 생존 활동을 지속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태어남을 선택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죽음은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당연히 우리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생물학적 생존을 멈출 수 있다. 그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나는 태어난 이유는 모르겠지만 딱히 죽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또 죽음은 두렵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거나 시도하지는 않을 것 같다. 현재로서는 그렇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래도 애써 죽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좀 알고 싶었다. 살아있음과 삶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 지도. 또 생존을 포기한다는 것, 그러니까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애써 죽으려면 살아있어야 한다. 죽은 것이 죽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산다는 것은 생물학적 생존이다. "그는 떠났으나~ 그의 예술은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이런 말이 아니라.
우리는 생명이 있는 유기체다. 유기체의 본능은 생존인 것 같다. 호랑이에게 너는 왜 사니라고 물어보면 호랑이는 대답 없이 사냥하고(물론 나도 유기체이고 죽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안 물어볼 것이다.) 자고 일어나고 다시 사냥할 것이다. 아메바에게는 물어도 소용이 없다. 아메바는 그냥 적절히 조건을 맞으면 분열을 해서 개체수를 늘릴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유기체는 저마다의 생존을 위해 신진대사를 하고, 아메바처럼 세포분열을 하든 새처럼 알을 낳든 해서 어떻게든 자손을 남긴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유기체의 본능은 살아있음이기 때문에, 유기체는 자신의 본능에 반해서 죽음을 선택하기가 어렵다. 유기체는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다. 그 이유는 모른다. 어쩌면 신이 살아있는 존재를 창조했을 수도 있다. 그럼 왜 창조했나? 우리는 알 수 없다. 단지 살아갈 따름이다.
아마도 대부분 종교에서는 자살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것이다. 특히 유일신 세계관에서 자살은 신이나 자연의 섭리를 저버리는 일이며, 기본적으로 '나쁜 일'이다. 비록 독실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프란치스코다. 당연하게도 가톨릭에서도 자살하지 말라 말한다. 그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한다.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니, 우리는 생명을 소중히 하고 스스로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종교적 가르침에 따르면 나는 스스로 죽어서는 안 된다. 사회가 죽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일단 현재까지의 생각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이미 이 정도 이유만으로도 스스로 선택해서 죽기가 쉬운 일이 아님은 알 수 있다. 나는 유기체로서의 본능을 거스르기도 어렵고, 통념이나 종교적 신념 상으로도 쉽지 않다. 음 역시 나는 애써 죽지는 말아야겠다.
삶은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나 강한 저주다. 선택한 적도 없는 선택지가 강요되어 있고, 그 과정은 퍽 유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심장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살아있다. 귀찮게 살아있고, 그렇다고 죽지도 말아야 한다니
그런데 나는 어떤 문제 인식이 있다. 죽음에 대한 의문이 금기시되고, 언급조차도 멀리해야 한다는 어떤 통념에 대해서다. 많은 이들은 잘살고 싶어 한다. 잘 사는 것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겠고, 고민을 안 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잘 산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전제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 소멸인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때문에 <잘 산다는 것>은 죽음과 어떤 의미로든 관련성이 있다.
그런데..이러한 생각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혹은
"당신의 오늘은 어제 떠난 이가 절실히 바라던 내일이었습니다"
류 대답으로 원천 봉쇄가 되어버린다.
아래 말은 <삶을 낭비하지 마세요>의 관점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래서 싫어하지는 않는다. 다만 죽음에 대해 생각을 막는 목적으로 쓰이는 '질문 없는 긍정성 강요' 성격이 되면 상당히 곤란해진다.(힐링과 위로 담론도 이와 비슷하다. 삶의 고통을 자꾸 회피하게 한다. ) 죽음에 대한 생각은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과 같지 않다. 죽음이라는 개념이 있으려면 살아있음이 있어야 한다. 죽음의 의미를 알려면 살아있음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살아있음의 의미를 알려면 죽음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다. 기왕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나고 살아있는 거. 살아지지 않고, 잘 살아가고 싶으니까.
죽음에 대한 고민은 삶에 대한 회의주의가 아니다. 삶을 직면하는 용기의 첫걸음이다.
유기체 중 인간만은 신기하게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 계속 물어보려한다. 나는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른다. 어쩌면 이유가 없거나 알 수 없는데 애써 고민하는 것도 같다. 다만 살아있다는 것은 확실하고, 신념이나 믿음과 무관하게 고통만큼은 현실이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삶이 너무 괴로운데 왜 살아가야하는가?
때로는 극한의 고통은 살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 고통스러우면 사람은 죽음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수용소에는 유대인, 외국인 포로, 동성애자, 장애인 등을 수용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학대와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들중 '무젤만'이 있었다. 무젤만은 수용소 사람들 중 살아있으나 살아있기를 포기한 사람들을 의미했다. 그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들은 '멍'한 좀비같은 상태였다고 한다. 눈빛은 초점이 없었고, 멍하게 서있거나 비틀대는 것이 그들이 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들은 영혼을 잃었다. 살아있을 의지가 없기에 두려움도 없었다. 자아가 없는 무젤만은 살아있으나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살아있음은 죽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들은 끝내는 수용소를 나갈 수 없었다.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씻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끝내 살아남았다. 그들이 씻어봐야 얼마나 씻었겠는가. 씻어야 한다는 의지와 보잘 것 없는 행동이 있었기에 그들은 지옥에서도 살아남은 것이다.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씻고 먹고 작은 무언가라도 갈망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닌가 한다. 의지를 잃은 인간은 자아를 잃고, 뮤젤만이 되어간다. 우리는 애써 죽지 못하고, 천천히 죽어간다.
나는 왜 애써 죽지 않는가에 대해, 죽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반대로 이루어내고 싶은 무언가가 없고, 자아를 상실할 만큼 정도의 강한 고통이 있고, 나의 삶이 끊어졌을 때 상처입을 이가 없다면 나는 진정 스스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죽지 않는다면 '죽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죽지 마세요' 라는 규범적 이유가 아니라. 단지 앞선 3가지 이유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만약 내가 스스로 죽어버리면 나의 부모는 고통받을 것이다. 나의 형제는 실의에 빠질 것이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은 나의 갑작스러운 상실로 어떤 형태로든 고통을 받을 것이고, 그들의 삶은 상처입는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타인의 삶을 파괴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나의 삶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은 다른 삶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고 있다.
자아가 존재하는 한 나는 결단코 자살하지 않는다. 나의 의지를 상실할 정도의 큰 병이 들어 나의 '살아있음'이 삶이 아니라, 살아짐의 연명이라면, 나는 '존엄사'를 부탁하겠다. 나의 뇌가 죽고, 나의 의지가 기거할 생물학적 기관이 소생할 가능성이 없다면, 나는 이미 죽은 것과 같다. 나는 자아 없는 뮤젤만이 되느니 존엄한 인간으로 존엄하게 죽을 것이고, 나의 소중한 이들도 나의 사라짐을 준비할 수 있는 마음과 시간의 준비를 할 수 있길 바란다.
오늘도
의지와 무관하게 심장은 뛰기에 우리는 살아짐을 당한다.
죽고 싶지는 않은데 앞으로 살아가야할 긴 시간을 잘 살아가기가 막막할 때가 있다.
산을 하나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앞에는 넘은 산보다 높은 산이 100개쯤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의 살아감은 보잘 것 없을지 모른다.
이도저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게 될 지 모르고
살아짐과 마찬가지로 의지와 무관하게 비명횡사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살아지는 것이 주어진 것이라면
나는 나의 의지로 무언가를 해내려는 살아감을 선택하겠다.
나는 애써 죽지 않을 것이다.
아
제대로
살기란
어렵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