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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철 Oct 25. 2018

재수없지 않기란 어렵다

재수없음, '나는 그래도 돼'라는 자기 우위의 확인과 각인. 

<제대로 살기란 어렵다> 연재를 시작합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이런저런 관찰과 생각들을 담을 예정입니다.


(상위 커버 사진은 미국의 코메디언 조지 칼린의 1970년대 사진이다. 그의 표정은 필사적으로 '니가?'라 말하고 있다 ㅎ)



재수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냉소와 회의적 시선의 말' 혹은 '꼰대'

우리 말 '재수없다'는 크게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좀처럼 '운수가 없다'는 의미. 다른 하나는 네이버 사전이 말하듯,  '무엇인가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고 기분이 나쁘다'는 의미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없이 재수없음을 마주한다. 오늘은 사람에 의해 사람이 느끼는 재수 없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누군가가 재수 없으려면, 그 대상에 대해 다음 3가지 요소 중 하나 이상이 관찰되거나 느껴지면 된다. 인간 관계에서 다음 3가지를 하지 않기란, 느끼지 않기기란 제법 어려우므로 '재수 없지 않기란 정말 어렵다' 할 수 있겠다.

1) 예의가 없다
2) 혹은 형식적 예의를 지키기는 하는데 뭔가 존중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3)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자꾸 뭔가를 가르치려 든다 혹은 그것을 참는 것이 느껴진다.

재수 없음에도 적극성과 농도가 있다면, 수동적인 옅음은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말투와 눈빛'일 것이며, 능동적인 짙음은 '꼰대'적 말과 행동으로 관찰된다. 둘 다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인데, '꼰대'가 인격에 대해 적극적이고 파괴적인 재수없음이라면, '회의와 냉소'는 인격을 갉아먹는 수동적 재수없음이다. 심지어 이것은 적극적인 인격침해의 한 형태가 아니므로 이 수동적 재수없음을 실천하는 이는 죄책감조차 느낄 수 없다. 혹은 느낄 필요가 없다. (좀 짱이라 할 수 있다.)

재수없음을 액기스로 모으고 농축하면 '꼰대'로 거듭날 수 있다. 라떼는 말이야~

우리는 조직에서 꼰대를 흔하게 만난다. 그런데 꼰대는 피하거나 어느정도 맞습니다~그렇죠~ 하면서 '수동적인 무시'를 할 수가 있다. 즉 꼰대에 대한 우리의 내성은 제법 강하다. 문제는 또 다른 재수 없음 유형인 '회의와 냉소'에 있다. 이 유형은 관계에서 자주 관찰하거나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생각보다 자주 주변인의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시선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들은 나의 동료, 친구, 심지어는 가족일 수도 있다. 이것이 좀 더 적극적인 형태로 '좋은 말'을 가장한 조언을 수반하면, 그 재수없음의 효과는 지속적이며 상당해진다. 사실 이들에 대한 대응법은 나 (귀하의 생각보다는 졸라) 잘살고 있어요~라고 평소에 보이는 방법 정도 밖에는 없다. 그러면 적어도 '조언을 가장한 재수없음'은 어느정도 피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자기 편집' 노력이 크기에 불필요하다 생각하면 하지 않아도 된다.


소리지르는, 음악에 미치는, 인생즐기는 챔피언인

이쯤되서 생각.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본 매거진의 기획 목적인 '제대로 살기'를 위해 '좋은 관계'는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수없음'이 관계하는 상호간 감정을 망쳐서 좋은 관계를 망치는 주범임에도 그것은 제대로 조명된 적이 내가 아는 한 별로 없다. '꼰대'에 대해서는 제법 논의가 있다. 그러나 다른 유형인 '회의와 냉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나는 보다 명확히 '재수없음'을 규명함으로써 잘 대응할 수 있는 지혜의 가능성을 열어보고 싶다. (답을 잘 모르겠다는 비겁한 변명입니다. 우리 같이 찾아봅시다 여러분)


인간은 언제 왜 재수가 없게 될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상대적 강함과 약함을 판단한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보편타당하고 비차별적이고, 사해동포적으로 재.수.없을까? 지극히 편견에 기반한 필자의 귀납적 관찰에 따르면 '아니다.' 인간은 상황과 상대를(누울자리를..) 봐가면서 재수가 없다. 참 지극히 정치적인 동물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에게 재수없으려면 걔가 나보다 약해야 한다. 재수없음은 다분히 선택적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재수가 없을까?

선사시대 야생의 인간은 짱약했다. 야생의 다른 동물이 그렇듯, 인간도 본능적으로 상대가 위협이 될지에 대해 판단해야만 했다. 인간은 날카로운 이빨도 발톱도 없었으므로 인간의 생존은 상호 간 '협력'에 기반할 수 밖에 없었다. 위협할 대상뿐만 아니라 누가 협력할만한 대상인지를 가늠할 필요도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상대에 대한 '쓸모'의 관점까지도 확장된다.


근본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내가 너보다 강하다. 너는 나보다 약하다

당신은 나보다 강하군요. 나는 당신보다 약해요.


이것이 오늘날 같은 지식정보화 사회에서는 

나는 알고 너는 몰라.

아 당신은 알고 나는 모르는군요


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의 우위는 가진 것의 유무와도 관련되기에

나는 있고 너는 없어

아 당신은 있고 나는 없군요


인간은 앞선 요소들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자신이 어느정도까지 '예의'를 차릴지 '존중'을 해야할지즉, 재수없음의 유무 또는 정도와 빈도를 결정하는 것 같다. 인간은 왜 재수없어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선택적 재수없음 = 나는 너에게 '그래도 돼'라는 자기 우위의 확인 
→  경쟁에서 지지 않았다는 '자기위안'

비교를 하고 당하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아주 필연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이다. 이 비교는 '나는 더 낫다', '나는 못하다'라는 판단을 지속적으로 수반한다. 무한 경쟁 시대에서 나의 '열등함'은 대단한 스트레스다. 반대로 '나는 너보다 낫다'는 상대적인 '위안'이 된다. 우리는 비교를 통해 '우월적 지위'를 확인받고 싶어한다. 상대가 '그래도 될만'하면 우리는 기꺼이 무시와 냉소, 회의적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심하면 '꼰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재수없음'은 '함부로 여겨도 된다'. '당신은 내 삶에 별 영향력이 없다'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재수없음에서 재수없는 이의 '열등감'과 '나르시즘'을 동시에 느낀다. 그런데 나르시즘은 '자기애'아닌가? 자기애가 왜 저렇게 '재수없게' 발현되나? 이 자기애는 요즘 (만병통치약급으로) 유행하는 말인 '자존감'과는 다른 것 같다. 심리학적인 정의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존감이 말그대로 자기의 '존재함'에 대한 존중이자 일종의 '자기 복원력'이라 생각한다. 반면 '자기애'는 자신이 가진 조건과 배경, 능력에 대한 인정에서 비롯된다 생각한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자기애의 '배경'들이 '더 낫고' '더 못남'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재수없음이란 자신은 경쟁에서 지지않았다는 자기 확인이자, 자기 위안이다.  


나는 재수없는 분들이 '자존감'은 낮고 '자기애'는 강한 분들이라 내 마음대로 판단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끊임없이 후려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은 더 나은 존재이며, 자신은 패배자가 아니라고 계속 확인받아야 한다.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으니, 남을 깎아내릴 수 밖에 없다. 자기를 지켜야하니까.


그러나 재수없음의 비용은 졸라게 크다.

언젠가 재수없는 분들께 이 사진을 보내세요

이 재수없음의 비용은 졸라게 크다. 크게 두 가지 측면이다. 하나는 자기 부정으로 인한 스트레스. 누구나 자신의 내면이라는 방에 저마다의 '땜빵'을 가지고 있다. 이 땜빵은 각자가 열등감을 느낄만한 포인트다. 경제적인 어려움일 수도, 연애할 때마다 차이는 것일 수도, 외모의 컴플렉스일 수도 있다.(탈ㅁ..죄송합니다;;) SNS가 발달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있어보이게 편집'할 수 있게 되었다. 방을 어둡게 하고, 비추고 싶은 부분에만 조명을 강하게 주면 된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애써 땜빵을 보일 필요는 없다. 문제는 적당한 편집을 넘어선 '자신이 아닌 것' 혹은 '자신이 되어야만 하는 것'을 자신인 것처럼 믿는 자기부정이다. 


재수가 없으려면 내가 쟤보다 나아야한다. 그러자면 일상에서도 땜빵을 노출해서는 안된다. 편집이 대단히 많이 필요해진다. 이는 필요이상의 노력과 스트레스를 가져온다. 나는 스물일곱 이후 그러니까 그때 내가 군대에 가고, 큰 집-빠른 차-좋은 직장 등의 '번듯함'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을때 이것이 나의 '땜빵'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냥 이것이 나의 땜빵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어쩌겠는가. '지금의 나'는 별로 번듯하지 않은 걸. 덕분에 나는 재수없는 분들의 후려쳐짐을 종종 경험하고 있다. 상관없다. '쟤가 되는 것'으로 인해 그 분들도 위로를 받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이고, 그들을 관찰하는 것은 인간 관계에서 제법 많은 통찰을 준다. 게다가 나 스스로는 나의 상황을 꽤나 긍정적으로 보고 있고, 그것이 퍽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 분들의 기대보다는 잘 살고 있다..) 


"어휴 니가 그렇지 뭐"


재수없음의 비용 두번째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미래의 잠재적 우호 관계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재수없는 이는 남을 낮추고 자신을 높이려 하기 때문에 주변에 긍정적 에너지를 주지 못한다. 그들과의 관계는 지극히 '이익균형'이 맞을 때, '상호 호혜적'일 때만 성립이 된다. 우리는 꼰대를 잠재적 인간 관계에서 '믿고 거른다.' 졸업하면 끝이고, 퇴사하면 끝이다. 안보면 끝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보다 교묘하게 재수없는 '회의와 냉소'는?


간단하다. 인간은 바보가 아니다. 인간은 정서적 동물이며 거울반응하는 존재다. 당신이 말과 행동, 눈빛에 담은 감정을 상대도 느낀다. 재수 없는 이는 잠재적으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재수 없는 이의 냉소는 '지금 별볼이 없는' 이를 향한다. 만약 당신이 재수가 없는 이라면? 그가 잘되어도 당신을 보기는 할 것이다. 다만 그는 필요로 당신을 만날 것이고 그 순간에도 그는 당신에게 우호적이지도 선의를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때서야 세모눈이 아닌 눈으로 회의를 거둔 채 그를 볼 것인가?


인간의 가능성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적어도 더나은 삶을 살려는 의지를 가진 이는 어떤 운과 기회를 만나 어떻게 잘될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별 의미없는 일'을 우직히 해내던 이들이 예상 밖으로 잘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봤다. 재수없음은 잠재 가치를 잃게하는 비싸고 쉬운 선택이다. 우리는 재수없을 때마다 친절과 배려를 행하는 인간성을 잃어간다. 이것은 대단한 손실이다. 관계를 지향하는 두 축이 '쓸모'와 '매력'이라면, 재수없음은 후자를 누수시키거나 의미없게 만든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함께 저녁을 먹고 싶지 않은 것.



그럼에도 재수없지 않기란 참 어렵다.

우리는 이렇게 사람을 바라봐야 한다 갓...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재수 없기 위해서 당신은 다음을 따르면 된다.

1) 묻지 않아도 가르치려 하면 된다.
2) 무례하거나 양보해서 형식적 예의만 다하면 된다.
3) 나는 알고 너는 몰라라고 암묵적으로 생각하면 된다.
4) 너의 능력은 별 볼일 없구나, 가진 것이 별로 없구나 라고 진심으로 믿으면 된다.
5) 상대에 대해 앞선 판단에 기초해 '지금 상태'가 계속 지속될 것이라 믿자.
(즉 너의 발전은 거기까지다~)

재수없지 않으려면 당신은 다음을 따르면 된다.

1)상대의 잠재 가치에 대해 주목한다. 
2) 있는 그대로 보되, 좋은 점을 크게 나쁜 점은 작게 보려 노력한다. 
(어차피 인간은 그 반대로 보기 때문에)
3) 상대에 대해 단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4) 그럼에도 판단했다면, '고정적'인 것이 아닌 '변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판단 기준을 이동시킨다.
5)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못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많은 재수없음을 마주한다. 그때 느낀 감정의 마이너스를 기억한다.

재수 없지 말아야하는데 참 쉬우면서도 어렵다. 

나도 모르게 나는 누군가를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또 그에게 무례하거나 냉소했을지 모를 일이다.


재수 없음은 스스로에게 향하는 칼날이다.

재수없음의 비용은 제법 크다.

재수없음 포지션에 서는 것은 관계의 축소와 제약을, 나의 가치가 차등되는 것 역시 허락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쓸모'에 대해 생각한다. 어쩔 수 없다. 나도 그렇다.

나 스스로에게도 묻는다. 어쩌면 나 되게 재수없는 놈은 아닐까


이 글은 일종의 자기 다짐이다.

나름의 내 노력이 운과 기회를 만나 성공에 당하더라도.

번듯해진 나, 더 갖추어진 나, 더 가지게 된 내가

부디 많은 이에게 보다 친절하길 배려하길 존중하길.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보다 많은 이에게 재수 없지 않길 바라본다.

그러나 그러기는 참 쉽지 않다.






재수없지 않기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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