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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철 Jan 30. 2019

번듯하기란 어렵다

좋은 대학 좋은 회사. 객관화, 수치화, 점수화. 비교하고 당하기

창백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경주트랙 위에서


달리고 있었다

나도 내 옆 친구도.

언젠가부터였을까



"우리는 창백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경주트랙 이외에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정확히는 다른 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지조차 의문이다. 때문에 이따금씩 떠오르는 ‘힐링하는 멘토’들은 마치 ‘전설’ 같다. 그것은 나에게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 같다. 불안하고 아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방황의 항해가 끝날 때까지 변함없이 우리를 비춰줄 등대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지 않는 트랙 밖에 길을 위태롭게 가더라도 그 길이 틀리지 않았노라고 말해줄 등대다. 때로는 좌절하더라도, 다시 할 수 있다고 우리를 믿어줄 수 있는 따스한 등대의 불빛이다."


일기장에 위 글을 적은 때가 아마도 스물 다섯살쯤인 것 같다. 그때 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이 마치 길이 정해진 트랙 위 경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오직 달리기만 가능한, 치열한 경쟁. 우리는 트랙을 선택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트랙 외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어느날 우리는 태어났고 눈을 떠보니 트랙 위에 놓여 있었다. 트랙 안은 창백하게 밝은 스포트라이트가 비춘다. 트랙 밖은 깜깜하다. 이때 누군가 트랙을 달리기 시작한다. 


어?
나도 일단 트랙을 달린다. 

그러다가 트랙을 달리는 것만 길인지 의구심이 든다. 달리려고 태어난 인생일까? 트랙 밖에 궁금하다. 스포트라이트는 밖을 비추지 않기에 트랙 밖은 깜깜하다.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기에 트랙 밖을 둘러보거나 나가버리는 것은 달리기에서 뒤쳐짐을 의미한다. 


하지만 나는 참을 수 없었고, 견딜 수 없었다. 스물 한 살. 나는 트랙 밖으로 '탈주'해버렸다.


출처는 엑스포츠 뉴스라고 써있음.


고교시절 모교에는 관악실이 있었다


우리 학교 우수 러너들이 상주하는 곳

전교 10등까지 특별관리 받는 관악실

그 곳에서 마주한 전교 1등


일기에 트랙 이야기를 쓴 것이 이전 글 <애매하지 않기란 어렵다>에서 말한 교육 사업 창업 3년차쯤이었고, 나는 그때 '트랙 밖 길'을 가는 것이 꽤나 힘겨웠다. 사실 뭐 다른 길을 간다고는 하는데 내가 겨레와 민족을 위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니고(대단한 신념이나 확신은 없었다), 남들과 조금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쿨하고 멋진 것이 아님도 알았다. 그저 트랙 밖으로 탈주하고 길을 찾던 나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해 헤메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가끔 언론에 나오는 크고 멋진 사람들은 '도전하라'며 희망을 주는 말을 하고는 했지만, 알고보니 그 분들 중 태반이 이미 트랙 위에서도 꽤나 승리자였다. (알고보니 실패해도 재도전이 가능한 다이아몬드 수저였다던가..)


트랙 안에서 달리기를 잘하는 이들이 트랙 밖에서 잘 해내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단지 나는 주어진 길 달리기에 그다지 재능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탓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교 7등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무렵 나는 공부에 대한 자신감이 제법 있었고, 학생회장에 당선당해서 기고만장했다. 내가 나온 고교에는 무려 '관악실'이라는 전교 10등까지를 수용(?)하는 독서실이 있었다. 왜 이 곳 이름이 '관악실'인지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무튼 나는 그 곳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일단 한 번 가보기로 했다.


관악실에는 전용 정수기가 있었고,(관악산에 약수터가 있듯이) 전교 10등 안 선택받은 러너들은 선생님들이 특별 관리를 해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배치고사부터 훗날 고3 마지막 기말고사까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은 <전교1등™>이 공부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 보게 되었다. 몇 주 간 나는 관악실에서 오며가며 <전교1등™>을 보았다.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꼭 필요할 때만 쉬었고, 나머지 순간에는 계속 책을 봤다.


이환경 씨의 고전, 드라마 <야인시대>를 보면 주먹황제 김두한이 딱 한 번 싸우지도 않고 싸움을 포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상대는 세계관 내 1:1 최강자 시라소니였다. 김두한처럼 나도 직감적으로 알았다. 객관화 수치화, 등수가 메겨지는 이 시험 공부라는 룰로는.  <전교1등™>을


나는 이길 수 없다

어쩌면 초인적인 노-오력을 하면 <전교1등™>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그동안 그 친구가 놀고 있을리는 만무하다) 어쩌다 한 번은 이겨도 계속 이기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김두한도 초인적인 노오력을 하면 시라소니를 이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안했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은 아버지의 원수! 공산당도 때려잡아야하고, 국회의원도 해야하고, 희대의 4달러 협상도 해야한다. 시라소니를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잘하는 일이 많았다. (실제 김두한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고 다만 극중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시험은 공정해야 하니까 모두 저 나무를 오르세요" 나무에 오르지 못하면 무능한가?


나는 <전교1등™>이 대단한 공부 재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재능을 '어떤 분야에 지속적으로 몰두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나름대로 정의한다. 1등 친구는 '공부' 재능이 탁월해 보였고 나는 그정도로 공부 재능이 있지는 않았다. 책을 읽는 것은 좋은데 나에게는 시험을 잘보는데는 영 재능이 없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는 그만큼 노력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당시 공부에 들인 노력 총량을 보면 맞다. 그 친구의 공부량과 공부 집중력은 나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감'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전교 1등이 될 노력을 다른 편에 쓰는 것이 내게는 더 맞을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 <전교1등™>는 정말 관악산 아래 대학을 갔고, 나는 문과에게는 6두품인 와우산 아래 학교에 갔다. 공부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모두가 전교 1등이 될 수는 없고, 나는 나쁘지 않을 정도로 시험 공부에 노력하고, 다른 방향으로 여력을 써보고 싶었다. 나도 김두한처럼 이것 저것해내며 살고 싶었다. 시라소니를 이기는데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4달라!)


노력하면 정말 번듯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자꾸 측정하고 비교하고 싶어한다.

더 많은 돈, 큰 집, 빠른 차,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번듯함'은 비교에서의 상대적 우위를 의미한다.


이제서야 '번듯함'에 대해 말한다. 네이버 사전이 말하는 '번듯함'이 가진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큰 물체가 비뚤어지거나 기울거나 굽지 아니하고 바르다.
2) 생김새가 훤하고 멀끔하다.
3) 형편이나 위세 따위가 버젓하고 당당하다.


'번듯함'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의미는 이제 '반듯함'으로만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쓰는 '번듯함'은 다른이에게 말하기에 부끄럽지 않고, 기가 눌리지 않는다는 의미에 가깝다. 


'반듯'하려면 품성이 바르고, 품행이 단정하면 된다. 꼭 예쁘거나 잘생기지 않아도 용모가 보기에 좋으면 됐다. 그러나 '번듯하려면' 돈도 좀 있어야하고, 대학도 좋아야 하고, 직업도 좋아야하고, 차도 좀 좋은 거 타야하고, 집도 집안도 좀 좋아야 한다. 번듯하려면 '보유한 자산'도 있어야하고, '타이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자. 자 이제 이 모든 것을 얻으려면 노력하자! 그런데 노력하면 정말 가능한 걸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부만으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을까


이 나라는 '사농공상'의 전통이 있는지, 공부를 잘하면 입신양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다. 번듯함의 조건인 좋은 '타이틀'을 얻으려면 공부해야한단다. 자연히 '노력'은 공부에 집중된다. 노력의 결과로 당신은 좋은 대학을 획득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도 있다. 이제서야 조금 번듯해졌다. 만약 당신이 그렇지 못하다면 당신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 여겨지거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 뭐. 개인적 노력이 부족해서 시험 결과가 못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1) 온전히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적 요건과 2) 노력의 효과를 극대화할 좋은 백업, 3) <전교1등™>처럼 개인이 가진 공부 재능의 정도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렇다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면 좀 '번듯'해질 수 있을까? '번듯함'이 사전이 말하는 세번째 의미대로 '형편이나 위세 따위가 버젓하고 당당함'이라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좀 부족하다. 당신이 초인적인 노력으로 과거에 급제하듯, 고시에 합격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번듯함의 본질은 비교와 상대적 우위에 있기 때문에 당신은 여전히 모자라다고 느낄 것이다.


내 번듯함은 그렇게 큰 성공이 아니야.
서울 안에 30평대 내 집있고, 적당히 좋은 차(제네시스 이상)를 타면 돼!

사실 꽤 어렵다..


매우 '좋은 직장'이 보장하는 상위 1% 급여인 1억 4190만원(2017 국세청)으로도 서울안에 괜찮은 30평대 집을 사려면 전혀 안쓰고도 5년 이상 모아야한다. 당연히 좋은 차를 살 수는 없다. 상위 10%의 급여는 7000만원이다. 물론 이렇게 극단적으로 자산을 운영하는 집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출이 좀 필요하다. 당연히 대출금은 매달 갚자(^^) 어쩌면 능력으로든 운으로든 주식이나 부동산 대박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모두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번듯함의 경제적인 조건에만 집중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만든 저작이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고, 사랑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에게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번듯함의 본질은 비교와 상대적 우위에 있기 때문에 당신은 여전히 모자라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니 번듯함에 집착하면 인생은 꽤나 괴로워진다.

번듯함의 기준에서는 언제나 더 '높은' '좋음'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돈이 있어도 학벌이 없으면 고통일테고, 좋은 학교 나왔어도 돈이 없으면 또 고통이다.



'번듯함'에 집착하면 나를 잃는다


번듯함에 과몰입하면 나를 잃는다.

번듯함은 노력 이상으로 운도 중요하다. 

진정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면, 이제 그냥 스스로를 존중해주자


가끔 관악실 10명의 러너들을 생각한다. 그 친구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사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어딘가에서 스트러글 중일 것이라 생각해볼 따름이다. 금수저가 아닌 이상에야 이 러너들이 높은 확률로 경제적으로 그다지 '번듯'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들 중 누군가 잘됐으면 축하해주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통계가 말하듯 딱히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나는 '번듯함'에 집착하면 나를 잃는다고 생각한다. 왜 아직도 학력고사 점수가 인생의 자랑인 어른들 많지 않은가. 대학말고 자신을 소개할 말이 없는 사람들 많지 않은가.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차'로 대답했다는 광고 카피가 있지 않았는가.


나-'번듯함' = 0

스스로가 이룩한 성취를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다. 만약 내가 책을 내서 대중에게 사랑을 받는다면 나는 진정 기뻐할 것이다. 좋은 집을 사면 그것도 자랑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번듯함'에 집중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이룬 성취에 대해 스스로가 자랑스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이른바 객관적 비교 가능 지표인 스펙도 있다. 하지만 비교기준에 따른 상대적 우위. 즉, '번듯함'에만 몰입하면 나는 나의 나머지 면에 집중하지 못한다. 나의 개성, 나의 취향, 나의 호오, 내가 사랑하는 내 가족, 우리집 강아지, 내가 사랑하는 음악, 내가 좋아하는 일기쓰기, 삶의 낭만과 향기를, 친절과 배려를 지키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정말 자신의 진심을 다해 노력하고 

그런데도 가지지 못했다면

그런대로 자신의 삶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번듯함'이 결국 누군가와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라면, 이룩한 성취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라면, 나는 '번듯'하지 않겠다. 그냥 내가 이룬 별 볼일 없는 나의 방황과 성취를 존중하겠다. 만약 우리가 진정 우리의 삶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먹고 살기위해 하는 항산 활동이 우리와 소중한 이의 삶을 그런대로 책임지고 있다면, 나는 우리가 진정 스스로를 존중하고 존경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번듯'하지만 '반듯하지 못한 야차'는 세상에 차고 넘친다. '반듯한' 당신이 그보다 사람다운 사람이다.


번듯하지 않은 내 인생이어도 나는 내 인생이 좋다


남들보다 '번듯'하지 못할지라도 

나 스스로 '반듯'하면 될 일이다.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면 될 일이다


많은 힐링 서적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스스로가 이미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장의 항산이 힘겨운데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기는 어렵다. 어제와 오늘이 달라진 것이 없는데,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믿음을 정말 가질 수 있을까? 스스로를 존중해야하지만, 정말 아무 것도 안하는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하기란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나은 삶으로 바꾸어가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나는 여전히 늦잠을 자고 헐렁한 인간이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의지를 잃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가 내 노력이 운을 만나 잘되면 좋아하고 아니면 좀 아쉬워하다가 또 뭔가를 할 것이다. 물론 성공에 당하면 엄청 좋아할 것이다.


나는 운이 좋음에 감사한다. 몸저누울만큼 몸이 아프지 않은 것에, 사랑한다 잘 말하지 못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남에 감사한다.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잘 자라준 동생에, 없으면 없는대로 결혼하고 꿈을 꾸는 형에게. 11년째 함께 살아가는 강아지 문돌이가 존재함에 감사한다. 궁핍하지 않고, 그럭저럭 먹고 살만큼 능력과 운이 있는 나에게 감사한다. 한편으로는 그런 운이 없는 이를 번듯하지 못하다고 책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정말 기회가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는 이도 분명히 있다. 이들을 위해 국가나 사회 제도의 역할이 있을 것이고 나 개인의 역할도 분명 있을 것이다.


오늘의 나는 좋은 차도 집도 없지만 그럭저럭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산다. 그냥 별 이유 없이 글도 쓰고 잘 못쳐도 기타도 치고 노래도 하고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일은 오늘보다 좀 더 낫지 않을까 기대하며 살고 있다. 뭐 하나 제대로 된 거 없지만, 무어라도 꿈꿔볼 수 있는 상황에 놓인 나의 인생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행복하냐는 질문에 불행하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 있게 산다. 


보다 많은 이들이 비교에서 오는 '번듯함'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한다

다만 더 나은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그러면서 점점 더 나아지는 스스로를 마주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더 행복에 가까운 삶인 것 같다.


물론 겟츠비처럼 잘 살면 좋긴 하겠지만! 안되면 할 수 없지 (^^)



창백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경주 트랙 위에서

오늘도 우리는 달리고 있다.

내 앞도 옆도 뒤도 열심히 달리고 있다.

번듯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나는 작아지고, 노력하면 번듯해질 수 있는 것인지

불안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기도 한다.

달리면서도 끊임없이 후려침을 당하거나, 우월감을 느끼게 되고는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받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오지 않을지 모를 '번듯'함 때문에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고, 과정에서 고통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잠시 트랙 한 켠에 멈추어서서 트랙 밖을 바라볼 따름이다.

멈춰보니 트랙 밖 꽃이 보인다. 오늘의 작은 즐거움이 보인다.

달리기 말고 다른 것을 잘하는 내가 보인다.

문득 번듯하기보다 유일하고 싶어졌다. 


나는 달리기가 아닌 룰로, 

트랙 밖에 내 길을 내보기로 했다.




트랙을 보니

저 멀리 무섭게 치고 달려가는 <전교1등™>이 100명쯤 보인다.

다들 참 열심이구나








번듯하기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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