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실체를 마주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그 어려움.
수만년전 자연에서 일개 유기체중 하나인 인간은 짱 약했다. 검치호 같은 큰 맹수처럼 강한 이빨이 있던 것도 아니고, 매머드마냥 큰 덩치인 것도 아니었다. 다른 강한 유기체들에 비해 생물 인간 각각 개체는 너무나 약했다. 강하지 않은 유기체 인간은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함께 모여 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위험에 대한 감지 센서를 발달시켰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불안'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낯선 곳에 들어왔을 때 우리는 '조심'하고 '경계'한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 감정, 사람 등을 마주할 때 우리는 쎄함을 느낀다. 그것이 줄 유해함 때문일 것이다. 그 감지 센서가 울리는 것이 불안이 아닐까.
현대 인간은 생물학적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이 자연상태만큼 많지는 않다. 물론 치안이 안정된 사회라는 전제가 있다. 이러한 사회에 사는 인간에게도 여전히 무서운 범죄나 사고의 위험이 있지만 이것은 맨몸으로 홀로 사바나, 아마존을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덜 위험할 것이다.
이제 인간은 쉽게 죽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다. 우리는 왜 불안할까?
어차피 잘 죽지도 않을 것, 안 불안해도 좋을 것 아닌가.
다시 우리의 친구 네이버 국어 사전을 소환해보자. '불안'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우리가 느끼는 '불안'을 온전히 담지는 못하겠지만, 그 단어로 합의된 의미를 보는 것은 유용하다. 각자가 느끼는 불안은 어떤 의미에 가장 가까운가?
1. 마음이 편하지 아니하고 조마조마함.
2. 분위기 따위가 술렁거리어 뒤숭숭함.
3. 몸이 편안하지 아니함.
이상 3가지 내용을 조합해서 생각해보면, 몸이나 마음의 '불안정'된 상태. 그러니까 고정되지 않고, 흔들릴 때 인간은 불안하다. 안정되지 않은 상태가 '불안'을 만들어 낸다. 여전히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의미나 원인을 규명하기에는 모자란 것 같다.
그 아래 이런 의미도 함께 덧붙어 있었다. 비록 사전이 실린 내용에 불과하지만 <심리>에서는 '불안'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단다.
특정한 대상이 없이
막연히 나타나는 불쾌한 정서적 상태
안도감이나 확신이 상실된 심리 상태
이 정의를 내 멋대로 해석하면, 불안은 그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 특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것을 풀어나가기가 어렵다. 불쾌한 느낌의 원인을 쉽게 제거하지 못하니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기에 생각이나 하는 일에 확신을 갖기 어렵다.
정의대로라면 현대인들은 불안의 원인을 모르니, 불안에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오기 어렵다. 불안은 미궁처럼 불쾌하고, 초조하게 하고, 살아감을 살아짐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불안이 정말 선사시대 '생존'을 위한 센서였다면, 죽음을 야기하지 않을 정도의 위험이라면 좀 덜 불안해도 괜찮은 것 아닐까? 불안 센서는 왜 여전히 울리고, 왜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인가?
나는 인간이 여전히 불안한 이유가 '인간이 사는 것'의 의미가 '생존'에서 '삶을 구성해 나아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생존을 넘어 자아실현과 더 나은 삶을 위해 '불안 센서'는 더 섬세해졌다.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는 인간은 삶을 잘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상태는 우리의 불안 센서를 자극하고, 불안은 우리에게 '더 잘살라고' 소리없이 부저를 울린다.
한편 우리의 친구 네이버 사전은 철학에서 보는 불안의 의미도 덧붙였다.(이 정의가 어떤 철학자의 생각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인간 존재의 밑바닥에 깃들인 허무에서 오는 위기적 의식.
이 앞에 직면해서 인간은 본래의 자기 자신, 즉 실존(實存)으로 도약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허무'에서 불안은 온다. 그것은 위기의식이며, 그 위기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찾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이라는 위기의식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찾으라고 말한다. 때문에 불안이 경고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그 상황을 극복하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보다 정확히는 그 가능성을 마주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해석이다. 다만! 이 해석을 참고할 때 불안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고양이를 두려워하지 못하는 쥐는 죽는다. 검치호 스밀로돈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죽는다. (어쩌다 살 수는 있겠지만, 그런 상태는 계속되지 않는다.) 불안은 필요하다. 현대 인간은 생존을 넘어 생활의 안정과 자아실현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 '불안'해진다.
불안은 유기체 인간이 가진 일종의 심리적 자기면역 현상이며,
자신을 찾으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외침이다.
앞서 자아실현이라고 거창하게 말했지만, 쉽게 말해 '제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불안해지는 것 같다. 인간은 인간이 모인 사회에 살고 있다. 사회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것들은 인간 개개인에게 큰 영향을 준다. '개인이 사회에서 주고받는 영향과 그것이 만든 개인의 상태. 그 상태의 연속적인 총체를 나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인의 삶은 영향을 받기도 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이다.
때문에 개인이 겪고 있는 불안의 이유를 알려면 현대 사회와 인간 삶을 구성하는 여러 조건들을 잘 따져보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각 개인에게 불안을 주는 요인들을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참. 불안 요인에 대해 말아보기 전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썸타는 상대와 잘 안될 것 같을 때 불안하다. 비트코인을 샀는데 떡락할 것 같으면 불안하다. 승진 시험을 봤는데 잘 안될 것 같으면 불안하다. 사랑하는 상대가 떠나갈 것 같으면 불안하다. 기대한 무언가가 안되면 불안하다. 반대로 기대를 안하면 불안함이 덜해진다는 의미지만,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원하므로 기대를 안할 수는 없다. 불안을 잘 컨트롤할 적정 기대가 중요하겠다. 아 어렵다 어려워.
무엇 때문에 불안한지 우리 스스로가 그 원인을 잘 직시해야 한다.
이제 불안을 유발하는 요인들을 살펴보자.
(각 대범주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들만 보자.)
맹자 says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
어렵게 볼 것도 없다. <생활이 안정되어야 바른 마음도 생긴다>는 뜻이다. 생존 이외에 내게 남은 돈이 얼마나 있는가는 불안/행복 정도에 아주 중요하다.
힐링 담론은 끊임 없이 자존감을 높이고, 마음을 바르게 먹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맹자 시대보다 훠~얼씬 경제가 사회와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내 잔고가 텅장이 되고 있는데 어떻게 안불안할 수 있는가. 경제적 곤궁에서 오는 불안은 근본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생존하고 생활하고도 남을만큼 돈을 벌어야 한다,
방법은 있다. 돈을 기대안하는 삶을 살면 된다. 산 속에서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살거나(돈 많이 든다든데..) 구도자에 가까운 종교인(?)의 길을 가면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계속 돈을 벌고 쓰는 활동을 해야한다. 사회에 살면서 경제적 안정이 없으면 불안하다. 불행히도 이 경제력은 온전히 힌 개인의 몫은 아닌 경우가 많다. 물려받을 재산이 꽤나 있으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은 더 적다. 당근 국가와 사회에도 큰 책임이 있다. 그러니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다운 삶'을 국가에 기대한다면 투표 열심히 하시라.
하지만 국가에만 기대하기에는 이 나라가 카타르가 아닌 이상은 어려울 것 같다. 개인은 무어라도 해야한다. 꼭 부자가 되자는 것이 아니다. '따뜻한 저녁과 웃음소리'가 가능할 만큼의 경제력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일 매일 라면 말고 일주일 한 번 마라탕은 먹을만한 경제력. 그러자면 더 배워야하고, 어제보다 내 능력이 더 나아야한다.
현대 인간들은 서로를 오지게 비교한다. 특히나 우리 한국인들은 돈으로 비교하고, 집으로 비교하고, 학벌로 비교하고, 비교하고 또 비교한다. 비교하면서 내가 쟤보다 낫네. 아니네 한다. 개인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에 비교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비교는 지나치면 개인의 정신을 상당히 많이 좀 먹는다. 나와 가까운 이가 잘되면, 그들이 밉다기보다 아무 것도 되지 못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비교 문화에서 고통받지 않으려면 잘된 이를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나만해도 번듯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번듯함의 '객관화', '수치화', '점수화'에서 크게 기대를 하지 않으니 요즘은 좀처럼 비교로 인해 크게 불안하지는 않다. 그러나 늘 이 시리즈가 여러분께 늘 말씀드리듯, 당신이 진정 최선을 다했는데 잘 안됐으면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과정에서 최선을 다한 자신을 존경해주자.
딱. 하나만 짚고가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함께 지내는 다른 인간에 영향을 정말 많이 받는다. 왜 좋은 직장만해도 <좋은 급여, 좋은 사람, 좋은 환경>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가족도 관계고. 연인도 관계다. 고립해서 행복한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면, 나쁜 관계는 불안을 야기한다. 기대하는대로 관계가 잘 되지 않으면 불안하다.
돌이켜보면 인간은 불안 최소 총량제같은 게 있어서 내 친구 중에 금수저급으로 잘먹고 잘사는 친구들도 어떤 형태로든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경우 보통 '관계'나 '자아실현'이 문제였다. 주로 아버지가 기대하는 삶과 자신이 바라는 삶 사이에서 갈등.
불교 철학같은 얘기지만, 상대에 대한 기대심리를 낮추면 관계는 참 편해졌다. 만약 내가 해준 것 사준 것이 있다면 그것이 사실은 상대가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관계가 좋아지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그것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해도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별 잘못없는데 나를 싫어하면 걍 싫어하라지~ 해버리자.
말은 쉽지만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마냥 불안의 미궁을 헤메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다.
몸 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포함한다. 정신 건강도 개인의 의지 차원에서 해결이 어려우면 병원에 가야한다. 단순히 의지로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몸이든 마음이든 개인은 더 나아지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고, 주변에서도 도왔으면 한다. 우울함이 심하면, 불안이 심하면 병원에 가자. 약을 먹자!
앞서 살펴 본 매슬로우 욕구 피라미드의 최상위 단계는 자아실현이었다. 철학의 정의에서 본 불안은 자기자신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 찾아온다고 했다. 인간은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 존재다. 아무 것도 아니게 된 자신을 맞이해야한다면 인간은 불안하다.
자아실현은 관계와도 크게 관련된다. 인간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니까. 모든 것이 다변하는 세상과 관계 속에서 나는, 어느덧 나 자신이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느라 내가 아닌 것을 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알아야한다.
나는 내가 아닌 것이 될 수 없다
나인 것이 되려면, 내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도 좀 알아야 한다. 이렇게만 되어도 자아실현이 크게 흥하진 못해도 망하진 않는다. 그러자면 말하고 쓰고, 표현하고 시행착오도 좀 겪으면서 나를 알아가야한다.
또 자아실현을 위해 너무 남의 말을 신경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들은 신기하게도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미래를 잘알고 있다.
당신이 잘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넌 잘될 줄 알았어!"
당신이 망하거든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뭐랬어. 내 말듣지 그랬냐."
어차피 궁예질 당할 거. 내 삶의 책임을 지지 않는 이에 대해서는 귀를 좀 막을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도 불편하지만 정말 진심 어린 조언에 대해 열려있을 필요는 있다.
당신의 그 가치를 증명하기 전에는 어차피 그들은 잘 모른다.
당신은 선택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면 된다. 잘되면 기뻐하고 잘안되면 다시 부단히 점검하고 더 나은 상황을 만들 방법을 찾자. 실체없는 불안에 괴로워들 말고.
그 밖에도 불안의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거의 대부분의 불안은 위 요인들로부터 유발됐을 것이라 생각한다.
앞서 우리는 1) 불안이 일종의 심리적 면역 작용이며, 2) 철학적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가능성이 된다고 했다. 이와 비슷하게 책 <원칙>에서 저자 레이 달리오는 3) 고통은 자기 발전을 위한 신호이며, 그것을 극복하면 더 강해진다고 말한다. 고통에 자아성찰을 더해서, 그 원인을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해나간다면 인간은 더 발전한다는 것이다.
결국 같은 아이디어를 각자가 다른 말로 하고 있다. 불안은 정신적 고통이니까.
불안하기위해 불안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불안은 꽤 유용하다.
나는 이것 저것을 많이 해보다 군대를 늦게 갔다. 의경으로 입대했다. 첫 1년간 손발이 묶여 있는듯해 답답했다. 안에서 이것저것 했지만 친구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치고 나가고 있었고, 나는 무표정의 제복을 입은 뽀시래기에 불과했다.(^^) 이 때 느낀 무력감은 분명 '불안'이었다.
군필자들은 다들 그랬겠지만, 말년은 참 편했다.(게다가 나는 29살이었기 때문에..) 사회 생각을 하면 걱정됐지만, 일상을 보낼 때는 걱정이 없었다.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하루는 자유를 제약할지언정 마음은 편하게 했다. 같은 자대 친구들과 똑같이 뭘 다해도 시간이 남았다. 남는 시간 운동하고 책읽고 이런저런 딴짓을 했다. 그렇게 그 날은 다가오고야 말았다.
29살 7월 5일.
갑자기 사회에 던져진 나는 자유가 두려웠다. 20대 내내 친구들과 함께 일군 회사는 이제는 없었다. 나와 주변을 지배하는 많은 것들이 명확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불안했다.
어떤 날은 너무 늦게 일어났다. 별다른 것을 안했다. '알아서 한다'지만 매일 매일 하루를 망치면 자기 혐오가 생긴다. 이런 불안이 쌓이면 결국엔 불안에 잡아먹힌다. 끝내는 자기부정을 하게 된다.
아무튼 불안한 나는 다시 무어든 해야했다.불안하기가 싫었으니까.
매일 빨래를 했다. 강아지를 목욕시켰다. 집에서라도 매일 운동을 했다. 많은 이야기를 들으러 이래저래 다녔다. 이런 일상과 마음을 일기로도, 이렇게 공개된 글로도 적었다.
그러면서 어디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할지 고민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 확실해지고 싶었다.
그 날로부터 오늘은 시간이 제법 지났다.
이제 나는 무엇 때문에 내가 불안한지 정확히 알고 있다.
어떤 것은 그때보다 나아졌고 어떤 것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다만 나는 이제 불안의 미궁을 헤메지 않는다.
나는 불안의 실체를 직면했기 때문이다.
들릴듯 말듯한 부저, 불안에 귀기울이며.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보내야하지 한다.
어제를 오늘보다 망치면 조금 불안하다.
그래서 내일은 잘해야지 생각한다.
오늘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망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적당히 불안한 나는 끝내 망하지 않을 것이다.
아
불안하지 않기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