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나다-열린의사회와 함께 한 몽골의료봉사기(19)
꽃을 따라 올라갔다. 처음엔 가시 돋친 꽃망울이 방울방울 달린 보랏빛 엉겅퀴였다. 무리 지어 핀 노란 솜양지꽃은 짧은 목을 가누며 빤히 우리를 올려봤다. 간혹 보이는 연분홍 개양귀비의 꽃잎은 노방으로 지은 깨끼저고리같이 투명했다. 보랏빛 솔체꽃의 긴 목은 바람에 흔들흔들 가녀리다. 약초로도 유명한 와송은 때글때글 영근 초원의 아이들처럼 야무지다. 고귀한 이름을 가진 에델바이스는 올라갈수록 흔한 꽃이 되었다. 멀리서 보면 그저 풀밭이더니 가까이서 보면 온통 꽃밭이다. 꽃들은 바람의 의지를 꺾지 않고 낮게 낮게 피어 있다. 꽃과의 눈 맞춤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릎 꿇게 한다. 멀리 서쪽 하늘이 붉어지고 있었다. 노을이 지려나 보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캠프 인근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초원지대가 불쑥 솟아 있다고 생각하면 좀 비슷할까? 나무 한 그루가 없었다. 대지는 어머니의 몸처럼 봉긋하고 부드럽다. 대지인 어머니는 자신의 피와 살을 내놓고 꽃을 피운다.
나를 꽃으로 피게 한 사람. 다시 하늘의 별로 돌아간 나의 부모님. 남자 문영필 . 여자 전순덕 부부. 꽃처럼 예쁜 나이에 결혼한 두 분의 결혼식 날은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이었다. 빼빼 마른 남편을 무던히도 챙기던 아내.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아픈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같이 누워있던 무뚝뚝한 남편. 나는 슬그머니 모른 척하고 돌아섰지만, 그날의 풍경은 생에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처럼 아련하게 생생하다. 세상에 기댈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자식을 다섯이나 낳았다. 때로는 거친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살아야 했던 절망의 날이 왜 없었겠는가?
어머니는 모과 같은 여자였고 아버지는 홍시 같은 남자였다. 누군가의 꽃으로 피었을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열매를 맺었다. 강인했던 어머니는 ‘아무 원이 없다.’라는 말을 남기셨다. 골짜기를 타고 낮은 포복으로 불어오는 바람들이 내가 앉은 언덕에서 만난다. 산맥을 타고 오르는 바람을 깊이 들여 마셨다. 내 폐부 깊숙이 바람이 길을 만든다. 바람은 지나가는 길마다 꽃들을 흔들어 깨웠다. 내 안의 꽃들이 바람길을 따라 분분히 흩어진다. 어느 날엔가는 나도 그 바람길을 따라 하늘의 별이 되겠지. 또는 새가 되겠지.
과거 몽골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풍장을 했다. 이는 날짐승과 들짐승의 몸으로 사람의 영혼이 깃든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유목하는 그들의 삶 속에 풍장은 가장 어울리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삼우제가 지나고 집 안으로 참새 한 마리가 들어와 밤새 울다 갔다고 했다. 아버지는 화장해서 평장을 하라고 하셨다. 봉분은 그래도 조금 올려야 한다는 마을 어르신들의 말씀에 따라 완전히 평평하지는 않으나 낮다.
몽골의 땅은 하늘을 품고 있다. 붉어지는 노을빛에서 바람 냄새가 났다. 톨강 끝자락부터 불이 붙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바람을 타고 초원을 순식간에 덮어 버렸다. 사위가 고요해진다. 고요함과 뜨거움이 맞닿는 시간에는 묘하게도 심장이 더 빨리 뛴다. 오래전부터 그랬다. 바람의 길 위로 별들이 총총 뜬다. 초원의 별들은 땅에 닿아 있다. 그것들은 꽃이 되기도 하고 별이 되기도 한다. 내 안에 이는 바람은 어디로든 유영할 것이다. 그러다 또 누군가를 만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