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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하라 Oct 18. 2020

테를지 국립공원의 검독수리

나를 만나다 - 열린의사회와 함께 한 몽골 의료봉사기(18)


 

   어떤 운명도 지구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저항은 있다. 바람의 힘을 거스르는 새의 날갯짓은 얼마나 힘든 우아함인가? 자신의 온몸을 밀고 밀어 손가락 마디만큼 피어오르는 들꽃의 개화는 살을 찢는 고귀함이다. 언덕 너머를 동경하는 나의 작은 발은 매일 조금씩 멀리 가는 꿈을 꾼다.    


  나는 생각이 단순하고 명징한 사람을 보면 부럽다. 어떤 현상을 보면 지나치게 사고가 확장된다. 테를지 국립공원의 거북바위 앞에 있는 아름답고 웅장한 하늘의 최고 포식자 검독수리를 보면서 또 그랬다. 

  테를지 국립공원의 거북바위 앞에는 검독수리 한 마리가 있다. 하늘을 덮고도 남을 날개, 여우 한 마리는 충분히 잡을 듯한 굵은 다리, 어떤 살도 꿰뚫을 듯한 붉은 부리를 가졌음에도 검독수리는 사냥하지 못한다. 1달러만 주면 주인의 신호에 맞춰 관광객의 팔에 올라앉는다. 사람의 팔에 올라앉았을 때만 잠깐 날 수 있다. 이미 자유를 잃어버린 독수리의 날개는 지구의 중력에 순응하는 듯 축 처져 있다. 

   몽골인들은 어린 독수리를 잡아 사냥새로 길들이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독수리를 사냥 도구로 사용한 것은 그들의 시조 신화에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몽골 비사의 기록에 의하면 보돈차르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오 형제 중 막내였고 그가 어머니로부터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대부분의 신적 존재는 인간의 몸을 빌어 태어나지만 인간 남자와는 무관한 신령함이 있다.) 평범하지 않은 자식이 태어난 것이다. 그는 종족으로부터 어리석고 바보스럽다는 이유로 버림받지만, 아마도 그것은 그의 존재를 두려워한 종족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유목하는 자들에게 무리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가장 유약한 짐승이다.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그는 매 한 마리를 만난다. 고독한 포식자의 최고 우두머리끼리 초원에서 만난 것이다. 보돈차르는 배고픈 독수리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른고기를 먹이며 사냥을 가르친다. 두 존재자는 동반자가 되어 서로의 생존을 돕는다.  


  무리생활을 하지 않는 독수리는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다. 독수리는 혼자 혹은 부부의 연을 맺은 쌍과 살아간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절벽에 주로 둥지를 튼다. 새끼는 1마리에서 2마리 정도 낳지만, 그중에 강한 놈만 살아남는다. 어미 새는 약하다고 더 돌보지 않는다. 강한 새끼에게만 먹이를 준다. 먹이를 잘 받아먹지 못하는 새끼 독수리는 결국 힘이 강한 형제 독수리에 의해 죽게 된다. 약한 새는 강한 새의 먹이가 된다. 어미 새는 무심히 그 순리를 받아 들인다.


   몽골인들은 자신의 사냥새를 찾아 아주 험준한 산에 오른다. 어미 독수리가 없는 틈을 노려 어린 독수리를 둥지에서 꺼내 온다. 사냥새로 기르기 위해 마른고기로 길들인다. 피를 뺀 마른고기는 쉽게 허기가 지고 허기가 진 독수리는 마른고기라도 얻어먹기 위해 주인에게 순응한다. 사람은 잘 길들이기 위해 배고픈 독수리에게 절대 충분한 고기를 주지 않는다.     


  내 사고의 확장은 검독수리의 자유의지까지 뻗었다. 사냥새로 길들여졌던 독수리는 이제 발이 묶여 놀이동산의 새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검독수리의 슬픈 운명이다. 자유에는 이면의 희생이 따른다. 희생을 보는 것이 두려워 때로는 안주한다. 그것이 묶인 검독수리를 보는 나의 반면교사다. 저항의 우아함과 살을 찢는 고통 속에서 피는 꽃의 아름다움이 검독수리와 나 사이에서 막막하게 서성거린다. 등 위에 돌을 올리고 매일매일 산을 오르는 시지프스를 인간이 갖는 일상이라는 형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상을 형벌처럼 짊어진 우리에게 선택이라는 자유의지가 있는 것 같지만 선택은 늘 계산되어 있다. 


  자연으로 돌아갈 시간을 잃어버린 테를지 국립공원의 검독수리. 인간은 독수리에게 사냥 본능만을 남겨두고 모두 거세시킨다. 허기진 배에 고기를 넣어준 인간만을 신뢰하고 복종한다.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가면서도 자본에 복종하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생각한다. 나 또한 한 사람의 노동자이다. 검독수리가 바라보는 창공은 어떤 세계일까? 내 눈에는 과연 무엇을 담아낼 수 있을까? 검독수리를 향한 눈빛은 나를 바라보는 내면의 서글픔이었나보다.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끈의 무게가 느껴진다. 어떤 풍경들은 꼭 나를 닮아 슬프다.    


 독수리를 사람의 팔에 올리고 날려 보내는 풍경을 멀리서 바라보다 독수리의 눈과 마주쳤다. 그 형형한 눈빛이 나의 심장을 뚫고 들어오는 듯했다. 아무것도 버리지 않은 눈빛이다. 먼 산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는 아직도 또렷하니 날카로워, 절망이나 체념이 없다. 저 우아한 새는 아직도 자신의 사냥 본능을 온몸에 품고 있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이 품은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는다.      

 몽골의 새사냥꾼들은 함께 살던 독수리를 8~10년이 되면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암묵적 약속을 지킨다고 한다. 칭기즈칸도 군마로 전장을 누빈 말들을 말년에는 온전한 휴식을 주었다. 전쟁터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한 말들은 잡아먹거나 일을 시키지 않고 초원에서 유유자적 풀을 뜯으면 살다 자연사하도록 두는 것이다. 묶여진 새의 운명이 풀어지는 날. 저 검독수리는 오직 자신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만 사냥을 하는 그런 자유로운 날을 맞이하리라. 이것이 나의 자유의지이기를 검독수리의 눈빛에 나의 눈빛을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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