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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최 Aug 22. 2023

소화가 안될 때 소화만 안될까.

복약안내서의 말_ 001

     소화가 안된다는 환자는 매일 적어도 한 명 이상 있습니다. 가장 불편한 증상은 아니라 다른 증상에 부록처럼 붙어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소화장애는 너무 흔해서 오히려 저평가되지만 삶의 질을 가장 확실히, 고질적으로 해치는 질환 중 하나입니다. 


제가 만나는 대부분의 환자는 아주 오랜 소화장애를 참고참고 참다가 오십니다. 그전까지 먹는 양을 줄이고 나쁜 걸 먹지 않고 규칙적으로 먹고 먹고 나서 걷고...  관리에 관리를 거듭해도 괜찮지 않을 때가 온 거지요. 모든 관리를 기울여서 괜찮은 건 문제를 요령껏 우회하고 있을 뿐 실은 괜찮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괜찮은 게 아니라 우회하는 게 너무 익숙해졌을 뿐입니다.


관리에 한계를 느낄 때, 내시경을 해보고 양약을 먹어봐도 해소되지 않을 때, 다른 답을 찾아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소화가 안되면 무엇을 의심하시나요? 위염, 위궤양, 식도염, 장염 같은 단어가 먼저 떠오릅니다. 밀가루 음식, 맵고 찬 음식, 과식, 급하게 먹었나, 같은 생각도 돌아다닙니다. 스트레스가 의심스러운 사람도 있을 거예요. 실제로 '스트레스받거나 신경 쓸 때 뭘 먹으면 바로 체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우리 몸에는 멈춰 있는 게 단 하나도 없습니다. 혈액, 림프액, 호르몬, 효소, 심지어 어제와 똑같은 손등의 피부도, 작년부터 거기 있었던 것 같은 뼈도 각자의 속도로 조금씩 달라지고 움직입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멈춰있는 걸 질색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게 아마도 우리가 먹은 음식물일 거예요. 소화기관은 뭔가를 담고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 점심에 삼킨 김밥 하나, 빵 한 조각, 혹은 포도 한 알이라도 입에서부터 항문까지 이어지는 트랙 어딘가에 움직이거나 분해되지 않고 멈춰 있으면 난리가 납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처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놓여있는 꼴을 보지 못하는 공장장처럼 뭐라도 들어오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화학적, 물리적 변화를 때려 붓고 다음으로 다음으로 옮기기에 바쁩니다.


막히는_건_참을_수_없어.jpg


소화가 안된다는 것은 이 과정 어딘가에 문제가 생기는 거지요. 흔히 소화장애를 '체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 절대적인 흐름의 어딘가가 정체되었다는 뜻입니다. 소화효소나 위산이 부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염증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본래 갖고 있는 역량으로 처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음식이 들어온 탓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가 뭐가 됐든 일단 소화장애의 본질은 '흐름이 멈췄다'는 겁니다. 




     소화가 안 될 때 음식만 덩그러니 멈춰있는 경우는 드물고 그 언저리 어딘가의 다른 흐름도 같이 정체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장 흔한 경우는 명치 아래에 음식이 걸린 것처럼 체하는 경우지요. 식도에서 위로 내려가는 음식이 멈추면 가슴에서 배로 내려가는 혈액 순환, 림프 순환, 호흡과 같은 흐름도 미묘하게 정체됩니다. 그래서 체하면 가슴이 답답하거나 머리가 아파오고 등이 뻐근해지는 거지요. 


반대의 경우도 성립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아 가슴이 답답해지고 호흡에 관여하는 상체의 근육들이 긴장되면 덩달아 내려가던 음식도 정체되면서 소화도 안된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때는 뭘 잘못 먹지 않아도 체하고 심지어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체기가 있습니다. '저는 물만 마셔도 체해요'라고 말하는 환자는 이 경우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위나 장에는 죄가 없고 그저 몸이 스트레스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쉽게 경직되는 사람일 뿐입니다.



정체가 계속되면 몸은 그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들어온 음식을 거꾸로 내보내려고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화기관은 속에 뭔가 정체된 꼴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차라리 도로 올라가 밖으로 내보내려 합니다. 심하게 체해 도저히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속이 메스껍고 구역감을 느끼며 결국 토하는 것은 위나 식도에게 괴로운 작용이지만 때로는 필요악의 반응이기도 합니다. 


한편 음식이 내려가지도 도로 올라가지도 않고 계속 머물러 있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방향으로도 흘러갈 기운조차 없는 때인데 이런 상태를 경험하는 사람은 마치 전신의 흐름이 끊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단지 소화가 안될 뿐인데 식은땀이 나고 머리가 어지러우며 온몸에 기운이 빠지고 쓰러질 듯한 느낌을 받는 분들이 있지요? 흐름이 멈추다(체, 滯) 못해 끊어지는(절, 絶) 겁니다. 마치 기절할 듯한 상태와 같지요.




     지난주에는 살면서 소화가 잘 된 날을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늘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는 분을 만났습니다. 소화가 안된 시간이 길면 이 상태가 보통이 되어 버려 안된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점점 증상이 나빠져 이제는 스스로 삶의 질이 크게 떨어진다고 느끼는 분이었어요. 위나 장에 관해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해보았지만 발견된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분께 다음과 같은 복약안내서를 써드렸습니다. 


소화가 안될 때는 소화만 안되지는 않습니다.

소화제를 먹거나 다음 끼니를 거르거나 나가서 좀 걷는 등 가벼운 대처로 넘어가는 일회성의 소화불량은 지켜보아도 좋지만 늘 일정 정도로 반복된다면 내 몸의 정해진 흐름이 어딘가 원만하지 않다는 신호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단지 위나 장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흐름을 막는 원인을 전신에서 찾아 해소해 준다면 증상이 개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트레스가 절대적이라면 긴장이 몸에 쌓이지 않도록 조절하고, 체력이 부족하다면 체력을 보충하는 것이 치료가 될 수 있습니다.

기능성 소화불량은 아무리 오래되었더라도 거의 반드시 좋아지는 증상 중 하나입니다. 훨씬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치료해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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