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약안내서의 말_ 003. '몸에 관한 뻔한데 중요한 얘기' 삼부작
하나, 건강하다는 것의 의미.
둘, 몸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셋, 치료는 치료, 관리는 관리.
김영민 서울대 교수가 경향신문에 쓴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아시나요. 이 글은 당시 수차례 회자되며 화제가 되었습니다. 특히 명절에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근본적인 질문으로 대처하라는 마지막 단락에 크게 감명받은 저와 친구들은 이 질문을 자주 밈으로 활용했습니다. 우리는 말끝마다 '떡볶이란 무엇인가', '쇼핑이란 무엇인가'를 붙이며 깔깔거렸지요.
*정확한 제목은 '[사유와 성찰]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2018.09.21)입니다. 무척 재미있는 글이니 꼭 읽어보시기를.
이글에 따르면 정체성을 따지는 질문은 대개 위기 상황에서나 제기됩니다. 건강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건강해지려면 뭘 먹어야 하는지 아플 때 뭘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는 지대한 관심이 있지만 평소에는 '건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지 않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생리통을 어떻게 낫게 할까', '두통은 왜 생길까'를 고민했을 뿐인데 환자를 보는 일이 거듭될수록 이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되었어요.
처음의 질문은 그저 '어디까지 치료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치료를 통해 환자를 어디까지 낫게 할 수 있을까. 현재의 증상만 나아지게 할 것인지, 이 증상을 일으킨 전단계, 전전단계의 원인까지 제거할 것인지, 혹은 치료가 끝나고 나서도 다시 재발하지 않는 데까지 갈 것인지. 환자를 건강하게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건강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한다는 건 치료를 통해 어디까지 회복할 수 있을까를 예측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것은 비단 저에게만 해당되는 고민은 아닐 거예요.
흔히 듣게 되는 '건강하다'의 의미에 대한 몇 가지 가능한 답안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질병이 없는 상태'입니다. 환자분들이 가장 자주 하시는 말씀 중 하나가 이겁니다. "얼마 전에도 건강검진을 했는데 결과에서 아무 이상도 없었어요. 깨끗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씀하시지요. "전혀 문제가 없는데 저는 왜 아픈지 모르겠어요." 그때마다 매번 말씀드립니다. "건강검진 결과 이상이 없다는 말은 '건강검진에서 발견이 가능한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의미이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랍니다." 질병과 건강을 정의할 때 필요한 건 흑백논리가 아니라 스펙트럼입니다. 지극한 질병과 지극한 건강 사이에 놓인 비무장지대가 존재하지요.
혹은 '건강하다'가 '체력이 좋다'를 의미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체력도 상당히 다양한 정의가 가능한 단어지만 보통 심폐활량이 좋고 근육량이 높으며 신체 능력이 탁월한 사람을 '건강하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조금 좁은 의미가 아닐까라고 생각하지만 요즘에는 상당히 많이 받아들여지는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운동의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는 시대이니까요.
그 밖에도 건강에 대한 정의는 제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제 나름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속적으로 삶의 질을 해칠만한 증상이 없는 상태
잘 먹고, 잘 자고, 화장실도 잘 가고, 감기에 걸려도 하루이틀 푹 쉬면 낫고, 일상적인 관리만으로도 가능한 수준의 회복 탄력성이 존재하는 상태. 일상생활 이외의 이벤트가 추가되어도 심하게 피곤해하지 않고 컨디션을 유지하는 상태.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적어도 체력이 달려서 포기하는 일은 없는 상태. 이러한 상태가 지속가능하다면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치료에서 '삶의 질'이라는 키워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삶의 질을 유지하려면 몸이 스스로 갖춘 회복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잘 먹고 잘 자고'는 이 시스템의 거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식을 섭취하는 일은 몸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유일한 통로이고 수면을 취하는 것은 몸을 쉬게 하여 충전하는 대체불가한 방법이지요. 몸에 생긴 일시적인 염증, 사소한 불균형은 잘 먹고 잘 자는 과정에서 대부분 스스로 복구됩니다.
굳이 환자들로 국한하지 않아도 생각보다 잘 먹고 잘 자는 사람이 무척 드물다는 것은 놀랄 얘기도 아닙니다. 식욕이 떨어지면 살이 빠지겠거니 반가워하는 게 보통이고 오늘 못 자면 내일 자면 되지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니까요. 매일 매번 먹고 자기 때문에 오늘 못한 건 대부분 다음 날 보완할 수 있어 방심하기 쉽지만 반복되면 몸을 스스로 복구하는 시스템은 점차 망가지게 됩니다. 이후에 나타나는 문제들은 걷잡을 수 없지요.
치료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자가 겪는 가장 큰 불편이 무엇이든 식욕이나 소화가 좋지 않고 잠을 잘 못 자는 사람이면 이 부분까지 반드시 함께 치료해야 합니다. 그래야 적어도 치료할 때만 증상이 호전되고 치료가 끝나고 나면 도로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환자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증상의 호전뿐만 아니라 호전된 상태를 유지하는 힘까지 기르는 치료가 필요한 거지요.
건강에 이르는 것도 '잘 먹고 잘 자는 것'도 허탈할 정도로 뻔하지만 도무지 이르기 어려운 이상향에 가깝습니다. 제가 치료를 통해 이루고 싶은 이상적인 상태도 그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환자들이 받게 되는 첫 번째 복약안내서에는 항상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한의학적인 치료는 바로 직관적으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몸이라는 유기체가 드러내는 복합적인 증상을
하나의 흐름으로 호전시킬 수 있는 치료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증상에 대한 대증 치료가 아니라
몸이 그러한 증상을 나타내는 기전 자체를 바로 잡아 나가는 치료이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천천히 길들여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당장의 증상이 개선되더라도 치료가 끝난 뒤 호전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신체의 기능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것을 목표를 두고 치료해 나가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단기간에 성과를 평가하지 마시고 지속적인 치료를 통해 몸의 변화를 관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