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약안내서의 말_ 004. '몸에 관한 뻔한데 중요한 얘기' 삼부작
하나, 건강하다는 것의 의미.
둘, 몸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셋, 치료는 치료, 관리는 관리.
몸은 정교하고 복잡한 시스템입니다. 이 시스템을 운영하는 몇 가지 대 원칙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항상성(Homeostasis)'이에요.
항상성은 '살아있는 몸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외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인체는 기능이 발휘되는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시시각각으로 세팅을 바꾸지요. 몸속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이 힘은 우리 몸속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화학적 변화의 핵심적인 동기가 됩니다. 백조가 유유하게 떠있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강물 속의 유속과 흐름의 방향에 맞추어 발을 쉴 새 없이 휘젓는 것처럼 멈춰있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아이러니가 항상성에 존재하지요.
우리 몸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변화는 곧 스트레스고 위기니까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힘은 생명을 위협하는 여러 변화로부터 우리를 지켜줍니다. 몸의 문제는 높은 확률로 이 항상성이 깨어지는 방향으로 나타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그알느낌으로). 우리 몸이 변화를 싫어하고 현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방향성은 항상 긍정적이기만 할까요? 어떤 문제들은 생활을 거쳐 천천히 변화가 누적되면서 만들어지는데 이 변화는 너무 느리고 점진적이라 원래 그랬던 것처럼 우리 몸을 속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바야흐로 만성질환과 증후군의 시대입니다. 요즘의 질병은 우리 몸의 고요한 평화를 깨며 몰아치기보다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찾아옵니다. 갑자기 쳐들어오는 적들은 현대 의학의 발전으로 빠르게 퇴치가 가능해졌거나 아예 사라져 버린 경우가 많지만 만성질환은 커다랗게 솟아오른 나무뿌리가 아니라 구석구석 퍼져있는 곰팡이에 가깝습니다. 현대에 우리가 경험하는 의료는 암, 고혈압, 당뇨, 비만, 각종 내분비 질환과 만성피로, 우울증과 같이 느리게 조금씩 뿌리를 내려 끈질기게 살아남은 질병들과의 전쟁입니다.
어떤 변화는 너무 천천히 쌓여서 변화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추동력이 생길 수가 없지요. 어느 날 문득 잘못된 것을 깨닫고 증상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 보지만 몸은 오히려 이 노력을 변화로 인식합니다. 만성 질환이 쉽게 회복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결혼을 하고 임신과 출산을 겪은 이후로 조금씩 체중이 늘어난 A라는 여자분과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 한동안 체중이 50kg 초반이었는데 결혼한 이후로 체중이 조금씩 늘어 60kg 초반이 되었을 때 임신을 하게 됩니다. 만삭 때 체중이 크게 늘었다가 출산 이후에 거의 원상태로 회복되었지만 어쩐 일인지 조금씩 다시 늘어 이제는 70kg대 초반이 되었습니다. 성장이 끝난 후에 체중이 20kg나 늘었지만 10여 년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늘어난 체중은 이제 웬만한 노력으로 빠지지 않지요. 이 분의 주소증은 비만이 아니라 소화장애와 생리통이었지만 그가 겪고 있는 문제와 서서히 늘어난 체중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어떤 변화를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는 경우는 그래도 쉽습니다.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방법은 찾으면 됩니다. 그런데 조금씩 깨어진 균형에도 어떻게든 적응하려 애쓴 나머지 어떤 문제는 전혀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만난 다른 여자분 B는 어떻게 해도 회복되지 않는 만성 피로와 수족냉증을 치료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상담 내내 이 분은 본인의 소화 상태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계속 파고들어 질문을 던지니 어릴 때부터 소화가 너무 안되어 불편한 것은 먹지 않고 양을 줄이고 주기적으로 공복을 유지하며 불편을 회피하도록 관리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선은 소화장애가 큰 문제라는 것을 설득한 후에 소화장애를 치료해야 만성 피로도 개선되리라고 말씀드려야 했지요.
재미있는 것은 이 명제가 우리 몸을 치료하는 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겁니다. 오래 천천히 누적된 문제는 가능한 몸이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되돌려야 합니다. 획기적인 방법으로 설사 해결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후에 그만큼 긴 시간을 들여 관리해야 합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요.
예를 들어 자궁근종에 대해 환자분들이 제게 꽤 자주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선생님, 저 자궁근종이 있는데 수술을 해야 할까요? 수술 안 하고 관리만 해도 되나요?"
자궁근종은 양성 종양이고 제거하면 그만이지 싶지만 실은 재발이 무척 잦고 생활습관의 영향을 많이 받는 만성질환에 가깝습니다. 크기나 위치에 따라 어떤 것은 추적관찰만 하고 어떤 것은 시술이나 수술을 진행해야 하는데 수술 여부는 삶의 질을 어느 정도로 해치는지, 다른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지와 관련이 있을 뿐 관리와는 무관합니다.
근종이 있다는 것만으로 무조건 생활의 관리는 해야 합니다. 수술을 하면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아요. 수술로 빠르게 종양 자체를 제거했더라도 재발하지 않게 하려면 똑같이 기저에 깔린 문제를 인지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수술과 관리는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모든 양성 종양이나 심지어 암에 관해서도 제 대답은 마찬가지, '수술을 하든 하지 않든 관리해야 한다'입니다.
고혈압은 다른가요? 혈압약을 먹고 있어서 혈압이 유지가 된다고 해도 혈압이 높아진 원인에 대해 관리해야 합니다. 당뇨도, 고지혈증도, 통풍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만한 사람이 지방흡입수술을 받고 나서, 혹은 약을 먹거나 주사 시술을 받고 나서 단기간에 체중이 비약적으로 줄어도 이후에 식단과 운동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요요는 약속된 미래입니다. 몸은 비만을 유지했던 시간을 더 평화로웠다 기억하고 갑자기 체지방을 잃게 된 사태가 불안하기 때문에 더 빠른 속도로 체지방을 쌓으려 합니다.
오랜 만성질환이 단시간에 노력 없이 낫는다, 혹은 나을 수 있다고 믿는 건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실제로는 없는 환상 같은 거지요. 그게 몸의 속성입니다.
만성질환의 치료는 환자의 몸을 천천히 길들여나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마음이 급하다고 우리집 강아지에게 갑자기 두 발로 세 번 걸은 다음 공중제비를 한 바퀴 반 돌고 착지한 뒤 장애물을 넘어 공을 가져오라고 시킬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우선 "손!"부터 시작해 시간을 들여 신뢰와 단계를 쌓아가야 하지요.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일은 탐정의 일과도 같아서 단서를 모아 범인을 잡는 과정입니다. 보통은 단 한 명의 극악무도한 대역죄인을 잡는 상상을 하지만 실은 긴 시간 뿌리내린 점조직 같은 범죄 집단을 끈질기게 검거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범인은 이 안에 있어!!" 김전일 만화 같은 쾌감은 현실의 치료에는 거의 없습니다. 만성질환의 치료는 수년간 작은 단서를 쫓아 좌절과 추적을 거듭하는 현실의 형사물이에요.
치료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걸 좋아하는 환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치료는 느리게 가는 게 오히려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에요. 긴 시간 누적된 병리를 제거해 나가려면 몸이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교정해 나가야 쉽게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몸은 정말이지, 변화를 싫어하거든요.